그게 아빠가 할 말이야?
나는 주말부부다. 엄마와 챗GPT로 영어 공부 하기로 했다는 아이 말을 들은 남편은 환히 웃으며 잘해보라며 아이를 격려했다. 그리고는 저녁 식사 후 싱크대 앞에서 함께 설거지 그릇을 정리하며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결국 사교육이 답인 걸 알게 될 거야."
지도 없는 여행을 떠나야 하는 우리에게, 물레에 찔려 영원히 잠들 거라는 저주에 맞먹는 앞날을 예견하고 남편은 주중 생활을 위해 서울로 떠났다. 그 후, 아이와 챗GPT로 영어글쓰기를 해보겠다는 나의 말에 온갖 걱정과 질책, 호기심이 근거리, 원거리에서 날아들었다. (아니, 나도 학원 보내고 싶다고!!) 고등어 엄마들은 내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입시 현실을 자각하라고 충고했다. 대학 동기들, 주변 엄마들도 다양한 질문을 보탰다.
"(야, 너) 그렇게 커리큘럼 없이 너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야(요)? (너) 그러다 진짜 후회한다(요)."
"AR 지수로 얼마나 나올 것 같아(요)?"
"아니, 스피킹 레벨은 얼마나 되는데(요)? 쓰기를 한다고(요)?"
"영어 레테(레벨 테스트) 한 번 받아보고 시작하지(요)? 유명 학원 교재 하나 곁들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나중에 자기 생각 없이 인공지능에만 의존하게 될 수도 있지 않아(요)?"
"챗 GPT 환각 증상 때문에 엉뚱한 내용으로 공부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질문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사교육 기관의 탄탄한 커리큘럼을 바탕으로 충분한 영어 노출을 거쳐 아이의 읽고 말하기를 먼저 다져준 후에 쓰기를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가 학원에 보내지 않고 온라인 강의 하나 안 들어본 아이를, 그것도 곧 중학생이 될 아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무모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입시 3 대장이자 인공지능 시대 프롬프트와 빅데이터의 바탕인 영어를 말이다.
질문은 거울과 같다. 쏟아지는 거울들 속에 우리의 시도를 비춰보니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숱한 질문 가운데 잘 진행되어 성과가 있을지 모르니 과정을 계속 알고 싶다는 속 보이는 이야기에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우리는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미래 먹거리이고, 그 미래 먹거리를 내 자식 품에 안겨줘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공유한 엄마들이니까. 또 하나, 우리는 다 내려놨다면서 절대 내려놓지 못하는 자식의 입시 열차에 올라탄 존재들이니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SKY에서 내 아이가 날아다닐 날을 꿈꾸는 사람들 아닌가.
"엄마, 지금 이야기할 수 있어?"
처음 이야기가 나오고 며칠 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아이가 찾아왔다. 내민 종이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무엇인가 미로처럼 적히거나 그려져 있었다.
"내가 조사했거든. 유튜브랑 블로그 중심으로 알아봤어. 영어 공부를 할 때 자주 쓰고 추천수가 많은 어플들이야. 6개 정도가 많이 쓰이더라고. 그중에 나는 딥엘이랑 파파고가 제일 좋은 것 같아. 왜냐하면......."
갑자기 아이 글씨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서체처럼 강렬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게다가 일목요연하게 표를 활용해서 장, 단점을 정리한 게 아닌가! 일찍 바로 알아봐 주지 못한 건 엄마의 노안 탓이라 하자. 너, 영어 공부해 보겠다고 그냥 한 말이 아니었구나. 진심이었어.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찌푸렸던 미간을 서둘러 폈다. 사춘기 아들이 공부에 관해 스스로 조사한 자료 발표를 들을 때 이런 미간은 실례다.
우리가 가리키는 곳이 등대가 되도록
엄마, 있잖아, 나는 학교에서 원어민 선생님과 내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게 너무 좋아. 그때 내가 개머ㅅ... 아니 아니, 내가 정말 멋져 보인다고. 응? 나도 알아. 길게 못해. 지금은 내가 하는 말이 진짜 짧거든. 맨날 하는 말밖에 못 해. 그래서 생각해 봤거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단원 평가가 생각났어.
학교에서 단원 평가 보고 나면 담임선생님이 틀린 문제를 다시 쓰고 문제에서 묻는 게 뭔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설명하라고 하셔. 그런데 말로 안 하고 글씨를 써야 되거든?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 하고 나면 머리가 뜨거워. 근데 있잖아, 그거 하고 나면 기억이 진짜 오래 가. 쓰려면 계속 읽고 말하고 그래야 돼. 손웅정 아저씨 말대로 하고 또 하고 그래야 해. 그래서 영어 쓰기를 해보고 싶은 거야.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써 볼 수 있잖아? 6학년인데? 모르는 거? 괜찮아, 선생님 계시잖아, 학교 가서 여쭤보면 되지.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남편님아, 여기 좀 보소. 어떤 여행이 될지는 몰라도 자기만의 나침반을 들고 항로를 찾아 지도를 스스로 그려보겠다는 이 아이, 우리 아들이라오.
#아들아너는계획이있었구나 #사교육이답이란걸알게될거야라니 #네가걷는길이_너의지도가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