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와 함께 살아가는 도시
호주의 12월은 한여름이다. 여름이면 한 번씩 리스모어의 울창한 여름숲과 푹푹 찌는 한낮의 열기가 떠오르곤 한다.
리스모어(Lismore)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북동부, Northern Rivers라 불리는 지역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름 그대로 강의 도시다. Wilsons River와 Leycester Creek이 만나는 넓은 범람원 위에 도시가 놓여 있다. 이 위치는 오랜 세월 동안 비옥한 땅과 풍요를 선물했지만, 동시에 도시의 운명을 결정짓는 약점을 함께 안고 왔다.
기후는 아열대다. 여름은 태양이 강렬하지만, 진짜 특징은 온도보다 습도다.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 쉽게 가시지 않는 땀, 비가 내리기 직전의 무거운 하늘. 리스모어의 여름은 ‘뜨겁다’기보다 눅진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리스모어 주변에는 농업과 자급자족적 공동체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 서로 다른 결을 지닌 공동체들이 점처럼 흩어져 있는데, 님빈(Nimbin)은 1970년대 히피들이 정착하며 형성된 호주 대안 문화와 환경 운동의 발상지이다. 세상의 속도에서 한 발 비켜서 대안과 영성, 공동의 가치를 끝까지 실험해 온 마을이고, 멀럼빔비(Mullumbimby)는 마켓과 음악, 일상의 관계 속에서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연대를 이어가는 보헤미안적 공동체이며, 바이런 베이(Byron Bay)는 겉으로는 자유와 개성이 앞서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예술과 치유, 자연을 매개로 한 공동체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흩어지는 살아 있는 실험실 같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중심도시인 리스모어에는 도시를 떠나 원하는 삶을 살고자 이주한 예술가들과 자연주의자들, 환경운동가들이 넘쳐난다.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고 있기에 그들의 공동체마을 방문해 보면 여느 호주의 도시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색채를 띄고 있다.
리스모어를 이야기할 때는 홍수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도시는 호주에서 가장 홍수 위험이 높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이유는 단순하다. 강이 만나는 낮은 지대, 그리고 물이 빠져나가기 어려운 지형. 비가 며칠만 집중적으로 내려도 강은 금세 제 몸집을 불리고, 물은 도로와 집, 상가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스며든다.
2022년의 대홍수는 많은 이들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강 수위는 사상 최고치(14미터)를 기록했고, 도시 중심부는 전부 물에 잠겼다. 아이들과 즐겨가던 3층짜리 도서관, 미술관, 아이들 학교.... 모두. 이것은 갑작스러운 재난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 온 리스모어의 슬픈 역사다. 1954년, 1974년, 2017년… 리스모어는 여러 차례 물에 잠겼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떠나거나, 다시 고치고, 또 살아왔다.
그래서 리스모어는 묘한 도시다.
자연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자연 앞에서 가장 겸손해야 하는 곳. 땅은 비옥하지만, 그 땅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곳이다.
리스모어는 2022년 홍수로 중심부타운이 다 잠기고 파괴된 엄청난 재난 이후에도 다시 일어났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재앙에 가까운 대자연의 위험이 서로 공존한 채로 삶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리스모어는 나에게 힘껏 일구어 온 것들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으니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와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온전히 누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결국 삶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손에 쥔 물질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이겨낸 연대의 기억과 어떤 위기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는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