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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모를 뻔했다.

소비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검소한 즐거움의 기술을.

by Astro bits

빚이 있는 삶은 상쾌하지 않다.

마치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해 남아있는 찜찜함이 늘 삶에 끼어 있는 느낌이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와 남편은 앞으로 절약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둘이 열심히 일 해서 돈을 벌고, 또 정해놓은 예산 내에서만 돈을 쓴다.

번 돈에서 쓴 돈을 뺀 나머지를 모아 모두 빚을 갚는데 쓴다.


빚을 갚고 나서 느껴질 자유와 해방감이 얼마나 짜릿할까.

더 이상 갚을 돈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눈을 감고 상상해 봤다.

그래서 검소한 생활방식은 지금 우리 집에겐 절실한 해결방안이다.


하지만 절실하기 때문에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도 있다.

절약이라는 목표에 잠식 돼 내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검소하게 사는 삶에 비참함과 초라함이 스며들게 놔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방치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이런 내 삶에 회의가 들고,

절약을 멈추고, 또다시 의미 없는 소비를 이어갈 것이다.


이번 주는 친정 식구들과의 외식으로 예산으로 책정했던 돈을 초과한 주였다.

나와 동생의 생일, 친정 부모님의 생신은 모두 한 달에 다 모여 있다.

다 큰 딸의 생일 선물을 챙겨 주시면서도, 딸이 돈을 쓸까 봐 걱정하시는 친정 부모님을 보는 건 마음이 너무 아렸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것만 있으면 언니와 조카들에게 선물해 주는데, 정작 나는 동생에게 해준 것이 많이 없다.


그날은 친정 식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제일 좋은 식사를 대접했다.

같이 식사하며 웃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 시간을 위해 지불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정말 쓰고 싶은 곳에 지출한 돈에 죄책감을 씌우지 말자고 다짐했다.

불필요한 곳의 지출을 줄여 정말 가치 있는 곳에 쓰는 밸런스를 지키는 그런 현명한 삶을 살아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것을 분명히 정의할 수 없었고, 그려낼 수 없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난 책 "The art of Frugal Hedonism" (검소한 즐거움의 기술)의 저자인

호주에 사는 두 부부, 애니 (Annie Raser-Rowland)와 애덤 (Adam Grubb)이 답해줬다.

검소한 삶은 무엇보다 즐거움을 동반해야 한다고.

절약은 나의 생활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야 한다고.



그들은 Frugal Hedonism (검소한 즐거움)이란 가계부를 보며 스트레스받거나, 공짜 쿠폰을 모은다거나, 비누 끝이 다 닳을 때까지 쓰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 만연한 사회에서, 남들과 경쟁하듯 소비하는 데 익숙한 요즘 세상에서

돈을 쓰지 않고도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소비하지 못해 불행한 삶이 아닌 굳이 소비하지 않아도 즐겁고 단순한 삶.


그들의 책 제목에 있는 헤도니즘 ( Hedonism)은 에피크루스의 철학 중 하나로,

소비가 주는 즉각적인 즐거움보다는 절제를 통한 지속가능한 즐거움에 더 가깝다.


아침에 일어나 맞는 햇살 한 조각,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

내가 직접 만든 영양가 있는 음식,

나를 안아주는 내 가족의 온기,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의 대화 등등.


모두 돈이 들지 않지만 분명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이다.

이런 소박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면

소비가 주는 도파민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통장에 쌓이는 잔고는 덤.


우리 가족의 목표는 빚을 다 갚은 후에도 이 frugal hedonism의 기술을 터득해서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하지만 절약의 과정이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럽다면,

그러므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그 삶은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들에

망설임 없이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여유 또한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또 오늘 해야 할 일을 한다.


빚을 지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모를뻔했다.

The art of frugal hedonism을.

소박한 생활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할 뻔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삶 역시 걱정 없이 소박하고 행복한 것들로 채워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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