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입구역입니다.>라는 안내방송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신촌을 지나쳐버렸다.
교육원까지는 걸어서 2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정도야 가뿐했다. 경기도로 이사 온 후로 30분은 우습게 걸었다.
8번 출구로 나가 경의선 책거리를 지나라고? 책거리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 역을 지나쳐버린 게 오히려 잘된 일로 느껴졌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9번출구 쪽으로 시선이 갔다. 역시 강남역은 11번출구, 홍대입구역은 9번출구지. 8번출구에는 뭐가 있더라. 사실 9번출구에도 무엇이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근 2년만에 온 홍대였다. 자아가 팽창하는 기묘한 옷차림, 관모양의 가방에 인조퍼 자켓, 90년대에도 쓰지 않았을 것 같은 조그만 뿔테 안경. 커다란 헤드폰에 화구를 짐짝처럼 들고 무심하게 지나가는 여자. 쇼미더머니에서 리액션을 담당할 것 같은 머리를 하고 집게핀을 정리하는 가게 점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을 뽐내고 있어 눈을 바쁘게 굴렸다. 행인들을 관찰하며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보는 것은 나의 은밀한 취미여서 이렇게 진한 사람들이 쏟아지면 욕심히 과해져 생각이 짧게 끊어지기만 한다.
지하에서 벗어나자 더욱 북적이는 사람들과 더더욱 번쩍이는 조명들에 조금 겁이 났다. 빽빽한 가게들, 그것도 전부 외관에 굉장히 힘을 주고 있는 가게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온통 핑크색 불빛에 뒤덮인 술집이 하나 둘 줄지어 있고 속눈썹이 예쁜 여자들과 죄다 검정색 옷을 입은 남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얌전한 베이지빛에 동그란 단추가 가지런히 앞을 바라보는 내 코트는 오늘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포근했다. 어제가 수능이었으니 오늘도 추운 게 당연하지 않나.
이래서 젊음의 거리라고 하는구나.
이제는 그 젊음에서 한 발 물러난 기분이었다.
최근 나는 25살이 된다는 것에 사로잡혔다.
제 나이를 가늠할 때면 무심코 25살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스티커 사진인 줄 알았던 셀프촬영 부스들을 보고 문득 혼자 사진을 찍어볼까 고민했지만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빈티지 옷가게들이 하나 건너 하나씩 있었다. 어느 것도 들어가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 지 지도를 보니 반대쪽으로 걷고 있었다.
책거리라길래 당연히 헌책방 거리를 떠올렸다. 막상 가보니 인스타에 올라올 것만 같은 캡슐 책가게들이 듬성듬성 이쁘장한 가로수들과 나란히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움직임이 없는 노인을 보았다. 현대 고령층의 단면같은 옷차림도 한 몫 하여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만들어진 동상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옆에 있던 금빛의 동상이 오히려 살아움직일 것만 같았다. 괜히 오기가 생겨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노인의 눈꺼풀을 노려보았다.
달이 이상했다. 밤하늘에 꽉 눌린 모양이었다. 뿌연 붉은 빛의 손톱만치 얇은 달이 씩 웃고 있었다.
곧이어 비틀린 나이키 로고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스쳤다.
전동킥보드의 우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눈을 돌렸더니 전동자전거였다. 우와 서울사람들은 전동자전거를 타나보네. 무심코 서울사람이라는 말을 써버리고 나니 이젠 내가 정말 서울사람이 아니라는게 실감한다.
언제는 서울사람이었나?
지역에 내 뿌리를 박는 건 허상이라는 걸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뿌리를 박을 수 있는 것을 찾아 영영 떠돌게 될까. 어느 곳도 내 고향이라 여기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