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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Oct 30. 2022

2년차, 대학 동아리에서
서울수도권으로

2. 메리오케스트라 생존기

2년차, 대학 동아리에서 서울수도권으로


첫 번째 기수를 마친 메리오케스트라가 서울 경기권으로 활동 반경을 확장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대학생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이면 청소년 단체, 지하철역, 그리고 시민관객과의 선순환구조를 지닌 문화봉사 플랫폼을 구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한 스타트업이 민지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메리오케스트라 관련해서 캠페인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발신자는 공유로 기부한다는 슬로건 아래 기업의 사회적 활동을 장려하는 '쉐어앤케어'라는 스타트업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당시 쉐어앤케어는 사용자가 콘텐츠를 공유하면 후원기업이 1000원을 기부해주고, '좋아요'마다 200원이 기부되는 방식으로 다양한 캠페인을 운영했다. 같은 방식으로 메리오케스트라의 다음 기수 활동으로 펀딩 캠페인을 기획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학교 중앙동아리 소속으로 공모 사업에 선발되면서 프로젝트를 운영했던 터라, 메리오케스트라 대표였던 나, 그리고 지휘자 주영은 메리츠아츠봉사단 해단식 이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해단식 당일에 주최측에서 마련한 다양한 식순을 마무리하고, 학교 중앙동아리 단원들과 인사를 했는데 대뜸 민지가 우리를 불렀다.


"셋이 맥주 한 잔 해요."


재원과 주영, 그리고 재원과 민지는 각각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기에 긴 시간 삼자대면을 할 일이 없었다. 메리오케스트라는 중앙동아리를 하는 재원과 주영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었고, 어찌보면 중앙동아리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재원의 학과 동기여서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한 민지였다. 그래서 더욱 의아한 세 명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애초에 두터운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닌 주영을 지휘자로 섭외한 재원이었고 주영 또한 스물 한 살인 재원, 민지와 함께 반 년 간의 문화봉사 프로젝트를 운영할 정도로 누구와도 금세 가까워지는 성격이었다.


그 자리에서 쉐어앤케어라는 스타트업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보았다. 워낙 페이스북의 공유나 좋아요를 기반으로 한 소셜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던 추세라 큰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민지에게 온 메시지를 몇 번이나 정독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 셋은 도원결의라도 하듯 메리오케스트라 2기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앞서 말했듯 메리오케스트라는 기수제로 운영되며 6개월에 한 차례씩 서울경기권 대학생을 모집했다. 하지만 우리는 쉐어앤케어를 통해 매칭된 기업 Vooz의 후원금 200만 원을 제외하곤 자본금이 없었다. 오케스트라가 통상 합주를 할 때엔 3시간을 잡는데, 흔한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대관하려면 한 타임에 못해도 10만원에서 평균적으로 15만 원 가량의 지출이 발생했다. 그래서 2기부터 지하철 역장님들을 찾아뵙기 시작했다. 실제로 문화봉사를 지하철 역에서 해야해서 역장님들을 만나 연주 공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겸사겸사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맥락에서 우리가 정기적으로 합주를 하겠다는 내용으로 설득을 했다. 그렇게 메리오케스트라는 5기까지 실제로 지하철 역에서 합주도 하고, 공연도 하는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시스템을 갖췄다. 덕분에 턱 없이 부족한 자본금으로도 오케스트라 단체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첫 기수에 만들었던 메리오케스트라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메리 오케스트라 해뿌까~'라는 다소 귀여운 문구와 함께 2기 단원 모집 포스터가 올라갔다. 펀딩 상세 페이지를 구성하기 위해 '청소년과 함께하는 문화봉사단'이라는 카피와 함께 본격적으로 홍보 소재를 제작했다. 그리고 서울수도권에서 대학생 단원을 모집하기 위해 페이스북 페이지를 비롯하여 에브리타임(대학생 시간표 앱) 홍보게시판에 모집 포스터를 배포했다. 


감사하게도 서울수도권 각 지에서 20명 남짓한 대학생들이 신청을 했다. 창립멤버 셋은 모두 동문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고민 없이 학교 학생회관에서 신입 단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라고 해서 실력을 평가해서 합격 여부를 가리는 건 아니였고, 직접적으로 악기 연주 경력을 묻고 활동 내용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주말에 지하철 역에서 합주를 하고, 문화봉사 공연을 할 거라고 설명했다.


그 때 기획 단원으로 소미가 합류했다. 소미도 주영처럼 작곡과 전공생이었는데 피아노를 잘 쳐서 메리오케스트라의 반주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기획 활동을 해나갔다. 창립 멤버 외에 기획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력이 충원되다보니 정기적인 회의 일정을 지정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매주 월요일 저녁 7시에 모였다. (그리고 이는 2022년까지 이어졌다. 메리의 기획팀은 약 8년 동안 거의 매 주, 빠트리지 않고 월요일 저녁마다 정기 회의를 진행했다.)


당시 재원, 주영, 민지가 모두 회기역 근처에 거주했는데 소미도 인근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끝나지 않는 회의를 강행하며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 저녁에 밤샘 회의가 진행되기 일쑤였다. 이제 갓 시작하는 사업체다보니 하나의 안건을 물고 늘어지면서 A부터 Z까지의 시뮬레이션을 마쳐야지만 완성되는 끝장 토론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2기 단원들에게는 1만 원의 회비를 걷었다. 밝은 성격의 소미가 매번 인터뷰를 진행할 때마다 스타벅스 커피 두 잔 가격이면 한 학기 동안 메리오케스트라를 할 수 있다는 멘트를 곁들인 기억이 난다. 우리는 그 돈으로 공연기획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MT를 기획하는 데 썼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문화봉사를 기획하는 만큼이나 MT를 준비하는 데 공을 들였다. 대학생 위주로 모인 단체다보니 20대 초반의 나이가 많았는데 학교에서 기획하는 신입생 OT의 강도만큼이나 빠듯한 프로그램을 준비한 기억이 난다. 1박 2일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대관해서 함께 이름을 외우고 메리오케스트라의 구호를 외치고 술 게임을 했다. 그러고 다음 날이 되면 다같이 허물 없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좋아서 하는 오케스트라가 되어서일까? 메리오케스트라는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처음엔 20명 남짓한 동아리의 형태였다면 3기부터 50인을 넘어서더니 5기엔 80인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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