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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Jun 17. 2023

세상은 요지경: 일단은 퇴사, 그 다음은...

우리는 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선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당연하다. 인간은 스스로조차 납득하지 못할 선택을 때때로 하기도 하는, 아주 복잡한 메커니즘의 생명체이니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아닌 걸 알면서도 가보기도 하는데 그래서 인생사 참 재밌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지금껏 살면서 눈 딱 감고 저질러보자 마음먹었던 일이 2번 있는데, 첫 번째는 대학생 때 등산 가방 하나 매고 훌쩍 떠났던 동남아 배낭여행이었다. 두 번째는 내 몸 하나 건사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된 완전한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책임을 뒷받침해 주던 유일한 밥줄을 내 손으로 직접 끊어야 하는 퇴사를 결정했을 때이다. 모두 평생 추억거리가 될만한 굵직한 사건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퇴사는 난생처음 마주한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다고 확신한다.

첫 직장은 누구나 알만큼 유명한 회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대기업 계열사로 복지도 괜찮았고, 사회 초년생이 으레 겪을법한 힘듦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추후 이직의 좋은 기반이 될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박차고 나왔으니 부모님의 이해를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았다.


훨씬 보수적인 세대를 거쳤던 부모님의 관점에서는 어른 아이의 투정이자 소위 말하는 요즘 것들의 부족한 인내심이 문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퇴사 후 그 어떤 대비책도 없이 저지르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고민의 산출이라고 한숨을 푹 내쉬었을지도.


그러나 그 어떤 설득의 말도 구태여 보태지 않았다. 그저 통보였을 뿐이다. 부모님이 대신 살아줄 수도 없는 인생일뿐더러 다시 고향에 돌아가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었으니 무슨 선택을 하든 어떤 후회를 하든 모든 것은 나로부터 기인해야만 했다. 온전한 내 힘으로 만들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행히도 퇴사 후의 삶은 상상 그 이상으로 안락했다. 아이러니한 게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런 날에만 꼭 정신이 또렷한 채로 기상한다. 출근을 위한 규칙적인 루틴은 금세 망가졌지만 인간관계 및 업무에 대한 압박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도했다. 그 자체만으로 성과 하나 없는 지루한 이 시간들이 평화로웠다. 일을 그만둔 후 진짜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았다.






짧았던 회사생활을 통해 얻은 마음의 상처, 그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선 휴식이라는 처방전이 필수였다. 그러나 부잣집 도련님처럼 때로는 한량처럼 먹고, 놀고, 쉬다 보니 그동안 저축했던 돈들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뿔싸. 옭아매던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감격에 겨워 수입원이 존재하지 않는 나의 처지를 잠시 망각했다. 한동안 돈 나올 곳 없는 백수라는 그 중한 사실을.


내 인생 내가 살 것이니 간섭하지 말라며 큰소리치고 서울로 상경했던 것도 모자라 통보식의 퇴사 폭탄을 던졌던 터라 부모님의 도움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생각도 안 했지만. 꼴에 자존심은 셌기에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는 불상사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욕심이었다.


또 그간의 휴식기를 뒤돌아 보았을 때,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바닥을 향했지만 심적인 충만감은 아주 가득했기에 정말이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때는 퇴사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에 별다른 차선책은 없었지만 그로 인한 후회가 없었다는 것이 내 선택이 옳았던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으니까. 따라서 이 상황이 조급하기는 하나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결심을 반복했으리라.





카페 한구석에 앉아 차가운 페퍼민트 차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의 놀이터를 응시했다. 청량하게 맑은 날씨 아래 구름 하나 드리우지 않은 표정의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순수한 결정체였을 때가. 그때는 내가 언젠가 커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하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는데. 심지어는 짧은 휴식 끝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취준생의 굴레에 또다시 재진입하게 될 줄은 더더욱.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인생의 흐름이 이다지도 놀라울 수가. 때로는 겁난다지만 언제나 그 감정을 이기는 건 흥미로움과 기대감이다. 마음을 보듬는 짧은 시간 동안 부정적이고 무력한 기색이 많이 옅어진 것인지 본래의 건강한 정신이 회복되었나 보다. 아니면 첫 직장에서의 경험이 너무 임팩트가 커서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각성할 수 있게 된 걸지도.


무엇이야 어쨌든 내 눈앞에 놓인 또 다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구인구직 사이트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기업이 연봉을 많이 주는지 얼마나 낮은 재직자 리뷰들이 있는지 나름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스트레스가 생긴다 해도, 역시는 역시나라고 부모님이 한심하게 바라볼지라도, 일단은 해본다.


감히 미래를 예견할 수 없기도 하고, 이전의 수많은 선택과 그에 따른 변화를 납득하기란 우리 모두에게 어려우니 굳이 모든 행동의 이유가 이해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보면 다른 복잡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면 최선일 수도 있겠다. 큰 산을 넘으며 깨달은 것이 있으니 앞으로 똑같은 상황과 과정이 반복된다 한들 조금은 덜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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