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영어 스피치 대회는 가고 남은 건 볼품 있어서

by 이수빈

드라마 <라이딩 인생>을 보면, 7세 서윤이가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가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처음엔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관심도, 흥미도 없는 일명 '족보'로 통하는 주제를 웅변식으로 달달 외워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지혜로 결국 서윤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진심이 통했는지 대회에서 원하던 상도 타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ENA 드라마 <라이딩 인생> 4화 중 한 장면



이 장면을 보는데, 문득 나의 중학생 때가 떠올랐다. 겨울방학을 앞둔 중학교 2학년의 끝자락, 칠판 옆 게시판에 교내 영어 스피치 대회 안내문이 붙었다. <환경, 사회, 가족, 학교생활 등 자유주제로 3분 이내 발표>가 안내문의 골자였고 몇몇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말이 자유주제지 교복자율화, 환경보호 등 그 당시 상을 탈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주제는 정해져 있었다.


나도 대세에 따라,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주제 중 하나를 정해 대본을 작성하고 연습했다. 대회가 시작되고 한 명씩 단상 위로 올라가 준비한 스피치를 보여주는데, 놀라울 정도로 스피치에 집중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발표자들은 본인 대본을 외우고 있었고, 발표를 끝낸 아이들은 옆자리 친구와 장난을 치거나, 엎드려서 자거나, 그도 아니면 멍을 때리고 있었다. 원어민 선생님을 포함한 영어과 심사위원 선생님 다섯 분만이 종이에 뭔가를 적거나 발표자를 쳐다보거나 하고 있었다.


어느덧 내 차례가 왔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스피치를 시작했다. 단상 아래에서 봤던 장면이 단상 위에서는 더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하긴 나조차도 말을 하고 있으면서 속으론 '아, 재미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청중은 오죽했을까.


그 결과, 사실상 참가상에 가까운 장려상을 탔고 모두가 예상했듯, 최우수상은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워서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한다고 알려진 친구가 받았다. 이변은 없었다.


뻔한 주제,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내용,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표정,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꾸며진 몸동작.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이 서로의 스피치를 듣지 않은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무엇보다 중학교 영어 수준이 이렇게 높았던가. 아무리 집중해도 반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너무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집중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니 잠이 왔다.


내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서도 그랬겠지만, 누가 봐도 한국의 평범한 공립 중학교 학생의 작문실력은 아니었다. 저 친구의 평소 생각,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고. 대회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 "사실 내 거 빼고는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ㅋㅋ", "야, 그래서 네 주제가 뭐였다고?"라는 얘기가 들려오는 걸 보면 나만 그랬던 건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교내 영어 스피치 대회는 어김없이 열렸다. 작년과 모든 게 똑같았다. 자유주제에 3분 이내 발표.


처음엔 평범한 주제로 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작년 대회 때가 생각났다. 아무도 듣지 않는 스피치, 마른 모래처럼 버석한 공기, 웃음기 없는 심사위원의 표정. 뭔가 다르게 하고 싶었다. 말랑한 분위기 속에서 재미와 감동이 함께하는, 무엇보다 모두가 듣는 스피치를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주제는 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 정해진 답이 나열된 게 아닌 흥미롭게 들을 수 있는 뻔하지 않은 이야기여야 했다. 마침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환경적 요인까지 겹쳐져 자연스럽게 <내가 감사한 사람들에게>로 주제가 정해졌다. 발표 시간을 고려해 대상은 가족, 친구, 선생님 세 그룹으로 한정했고, 발표문을 쓸 때는 일부러 쉬운 단어들을 골랐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올만한 단어들로. 문장 구조도 단순하고 짧은 호흡으로 구성했다. 있어 보이는 어려운 단어와 길고 복잡한 문장은 의미 전달만 헤칠 뿐이었으니까.





시작은 좋았다. 또렷한 목소리로 주위를 사로잡았고 준비한 문장은 매끄럽게 발화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시련이 찾아왔다. 3분의 1 지점에서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졌다.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짧은 순간, 고민했다.


'지금 대본을 봐도 될까?'


꼭 외워서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지만 스피치 대회이니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서 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더듬거리다가 시간이 끝나버리거나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 중도 포기를 하더라도 대본을 꺼내는 경우는 없었다. 종이를 꺼내 읽는 순간 감점이 될 테고 그러면 상은 물 건너갈 확률이 높으니까. 무엇보다 암기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쪽팔리니까!!


머리를 굴렸다. 나는 상을 받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무안당할 위기를 넘기고 싶은 것인가. 아니, 모두 아니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이야기를 끝까지 잘 전달하고 이 단상을 내려가고 싶었다. 상이나 무안당할 위기는 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다행히 지척에 대본이 있었다.


빛의 속도로 손을 뻗어 대본을 펼치고 멈춰 선 부분부터 다시 스피치를 이어갔다.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놓친 호흡을 다시 가져오는 데 온정신을 집중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알아듣고' 있었다. 간결한 문장과 쉬운 단어는 청중의 마음에 팔랑이며 내려앉았다. 중간중간 내가 의도한 부분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고, 모두가 한 번쯤 겪었을 학교 생활 중 경험에 대해서는 공감의 눈빛이 스쳤다. 특히, 영어 선생님이자 옆에서 대회 진행을 맡고 계셨던 담임 선생님을 언급하면서, 선생님 덕분에 영어를 좋아하게 되고 이 대회에도 참가하게 됐다고 감사하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깜짝 놀라면서도 수줍게 좋아해 주셨다. 영어 선생님께 영어로 진심을 전하는 건 한국어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것과는 또다른 울림을 마음속에 일으키는 일이었다.


땡, 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지막 땡큐, 가 겹쳐졌다. 영어과 선생님들은 펜을 내려놓고 잔잔한 미소와 함께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원어민 선생님은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그래,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잖아.' 하는 표정으로.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한 달 후, 스피치 대회가 머릿속에서 가물가물 잊힐 즈음 최우수상이라는 결과가 상장과 함께 교실로 도착한 것이다. 대본을 봤는데도 1등을 할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얼떨떨해졌다. 물론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대본을 보면 실격이라는 규정은 없었다. 감점은 됐을지언정 각 항목별 채점 기준에서 합산했을 때 최종 점수가 가장 높았다는 결론이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제는 소위 족보라 불리는 것 중에 해야 하고, 태도는 근엄하고 진지한 톤이어야 하며, 이야기 전달보다는 대본 암기 시험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을까. 조금만 관점을 달리 하면 충분히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서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마음가짐만 단단하다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게 1등 상장보다 이날의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얻은 더 값진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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