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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Feb 18. 2023

별마당도서관, 초등학생과 어른의 질문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초청강연 일화를 통해 보는 읽기의 의미

2019년 6월 6일 늦은 7시, 별마당도서관에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초청강연이 열렸다. 신작 <죽음>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베르베르가 '상상력과 소통’을 주제로 독자들과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의 전작 <고양이1,2>를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베르베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강연 시간에 맞춰 갔는데, 멀리서부터 인파 행렬이 넘실대는 게 보였다. 강연장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작가 강연에 열정적일 줄이야, 놀라우면서도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강연은 동시통역으로 진행됐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한 문단 정도를 불어로 말하면 통역사가 한국어로 통역하는 식이었다. 그의 불어 발음은 부드럽고 유연했다. 통통 튀고 음울하면서도 발랄한 그의 작품 속 목소리와는 대조적이여서 특히 인상에 더 깊게 남았다. 이런 목소리와 발음을 가진 작가라니, 그의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베르베르의 강연이 무르익고, 신작 <죽음>에 대한 질의응답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여러 사람이 손을 들었고 베르베르가 차례로 지목했다. 첫 번째 지목자는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마이크를 잡더니 빠르고, 또 급하게 말을 시작했다. 책을 읽어봤는데 특정 페이지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행동이 왜 죽음을 의미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베르베르는 꼬마 독자로부터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며, 잔잔히 웃으면서 해당 장면의 의미와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아이가 그래도 갸웃거리자 죽음이라는 주제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기 힘들 수 있으니, 시간이 흘러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때 다시 읽어보면 의미가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부모님과 이야기 나눠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덧붙였다. 


두 번째 지목자는 40대 초중반의 여자였다. 아이와 마찬가지로 마이크를 잡더니 빠르고, 또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한국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시작해 딸이 좋아하는 작가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찾아서 읽는다 등, 온갖 미사어구를 동원해가며 찬사를 쏟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저 찬사 뒤에는 어떤 질문이 올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한편 약간의 불안감이 내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길고 긴 서론 끝에 여자는 격앙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팬이라서 그런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어 줄 수 있나요?

순간 강연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통역사가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질문 아닌 질문을 불어로 옮겼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더 멋쩍게 웃으며 강연이 끝난 후 싸인회를 할 시간이 있으면 해주겠다며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또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혀야 했던 건 나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이었다.



'읽는다' 라는 행위가 어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회사에서 보는 서류, 이동하기 위해 보는 도로 표지판, 말과 행동 속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동료의 마음, 을 읽는 게 어른에게 있어 '읽는 행위'로 규정되는 순간이 오는 걸까? 경제 활동과 일상 생활을 하기 위해 활자와 사람을 읽는다는 의미가 강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말이다. 이때 어른은 어릴 때 책을 읽던 순수하고 무심(無心)한 마음과는 멀어지게 된다. 하긴 목적이 없던 책 읽기는 중학생, 이르면 초등학생 때부터 생기부 채우기, 대회출전 등의 목적을 가지게 되면서 변하게 된다. 결국 어른에게 '읽는 행위'란, 끊임없이 자신을 인증하고 증명해내기 위한 도구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읽는 행위, 그 자체가 가진 즐거움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어른들에게 오늘 이 '꼬마독자'는 초심(心)을 알려줬다. 유명작가와의 인증샷, 물론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의 좋은 대화는 나에게, 혹은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살아가게 할 수 있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권'은 경매에 나오지만, 워렌 버핏과의 '인증샷 찍기'는 경매에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물론 점심식사를 하면서 인증샷도 찍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사람도 있겠지만, 몇십 몇백 억의 가치를 가격으로 지니는 이 점심식사의 주목적은 대화일 것이다.) 작품에 대한 질문시간이 인증샷 요청시간으로 둔갑되어버리는 건 정말이지 너무 슬픈 일이었다.


이날 내가 별마당도서관에서 본 건, 어쩌면 무엇을 어디다 잃어버린지 몰라 서성이고 있는 어른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초등학생과 어른의 질문은 달랐고, 나는 다만 심히 부끄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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