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느지막이 자고 일어나 가족들과 점심을 먹으러 차를 타고 가고 있을 때였다. 이런저런 주제로 얘기를 이어가다가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내 고등학교 때의 한 일화로 대화가 흘러갔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중학교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고 서로에 대한 탐색을 하다 보면 얼레벌레 치게 되는 그 시험, 누군가에겐 '어라? 고등학교,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라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해주지만 누군가에겐 불쾌감을 넘어 좌절감을 주게 되는 바로 그 시험(물론 후자가 대다수라는 게 함정이지만..)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미리미리 준비하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왜 항상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전투력이 상승하는 걸까? 4일 동안 치러지는 중간고사 기간 중 첫째 날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아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날 저녁부터 부랴부랴 공부하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늦었다는 걸 알지만, 어쩌랴? 옆에 애가 뛰기 시작했는데 나도 뛰어야지, 별 수 있나.
그렇게 각자 혼돈의 밤을 지새우고 맞이한 둘째 날 아침. 전날 밤을 새워서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아이들이 손에 요약노트를 들고 긴장된 표정으로 교실문을 들어서는 그날은, 영어와 사회, 기술가정 시험이 수술대에 오를 예정이었다. 나 또한 주위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가는데 문득 이런 얘기가 내 귓가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야, 들었어? 2반 000 수능특강에 나오는 지문 통으로 다 외웠대."
"에엥? 그걸 어떻게 다 외워?"
"지금 자기 반에서 열 번째 지문 암송하고 있대."
"...와 미친 거 아니야? 대단하다.."
응? 뭘 외워? 그 당시 우리 학교 영어시험범위는 수업시간에 다루는 원서, 다의어 프린트물, 수능특강 등으로 꽤나 광범위했다. 그중에서 EBS 수능특강 교재의 시험범위는 열다섯 장 정도였는데, 한 장에 10~12줄 정도 되는 지문 4개씩, 총 60개의 지문이 시험에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 말에 따르면, 밑에 보이는 것과 같은 지문 60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는 것이다.
뭐.. 뭐야.. 그게 가능하다고..??? 괴물이야?!!! 한국어로 된 이만한 양의 글을 외우는 것도 힘든데, 영어 지문을 다 외웠다니.. 시험을 보기도 전에 이미 패장의 마음이 된 것 같았다.
영어 네이티브가 아닌 이상, 전치사 문제나 한국어로는 말이 되지만 미묘한 의미 차이로 원어민들은 쓰지 않는 표현은 아무리 봐도 답이 뭔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다. 특히, 긴장이 극대화되는 시험시간엔 더더욱. 그래서 시간절약을 위해 아예 지문을 통째로 외워서 전치사 문제와 같이 비교적 간단한 문제는 빨리 풀고 넘기고, 변별력을 위한 난이도가 높은 문제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하자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영어과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가르친 논리력과 추리력을 활용해 답을 도출하기를 원했겠지만, 당장 내신점수가 걸린 아이들에겐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했기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지. 시험이란 전쟁터에선 단순암기로 문제를 맞히는 것도 실력이었고 전략이었다.
그때 알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나름 암기력이 뛰어난 편인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에 오니 나는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라는 것을. 다른 차원의 암기력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혼돈의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 친구의 방법이 맞았다는 판단을 내린 몇몇 다른 암기력 괴물들은 하나 둘 숨겨왔던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로도 이 암기력 괴물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시험 범위 내의 몇 십 개나 되는 지문을 착실히 외웠고, 그들의 시험지는 점점 더 많은 눈이 내리는 겨울왕국이 되어갔다. 물론 내 시험지엔 꾸준히 비가 내렸지만. 하하.
이런 내 얘기를 찬찬히 듣고 있던 친오빠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난 네가 더 대단한 거 같은데? 영어지문 외우는 건 단순히 활자를 외우는, 말 그대로 '암기력'인데, 넌 오감을 이용해서 특정 상황을 묘사해 내는 '기억력'이 엄청 좋잖아.
그렇다. 난 과거 특정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해 내는 능력(?)이 있다. 단순히 누군가와 했던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때 태양이 작렬하듯 뜨거운 날이었고 몇 번 국도의 어떤 표지판 밑을 차를 타고 지나고 있었고, 지코의 '아무 노래'의 어떤 가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핸드크림의 무화과 향에 마음이 차분해졌고, 그때 휴대폰에 시간이 숫자로 11:43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특정 상황의 전체적인 맥락을 점점이 연결하듯이 기억하는 편인데, 친오빠가 어떻게 그런 거까지 기억하냐고 묻기 전까지 난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줄 알았다.
오빠 말을 듣고 나니까 '엇? 그런가? 이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는데.' 싶었다. 오감을 통해 감각한 일련의 경험들을 연결해서 저장하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는 걸, 오빠 덕분에 알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걸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 난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에 더 집중하느라 정작 내가 가진 건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이미 내 안에 있었는데도.
그렇기에 나에게 이로운 사람은 "나의 강점을 알아봐 주고 알려주는 사람"이다. 심지어 미처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부분마저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이로운 사람이 주위에 많이 있을수록 내 삶은 풍요로워지고 밝아진다. 무엇보다 이들과 함께하면 나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그러니 이로운 사람들과 함께하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는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고 아껴주자. 그와 더불어 나 또한 이로운 사람이 되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