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결정이 종종 실패하게 되는 이유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 학교에서 교복을 바꾸려고 하는데 재학생들의 의견을 설문조사로 물었다.
총 3가지 교복이 교체 후보로 제시됐는데, 1번과 2번은 무난한 디자인에 네이비톤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고 3번은 취향이 크게 갈릴 만한 옷이었다. 일명 '드림하이 교복'으로 불리는 옷이었는데, 보기엔 예뻤지만 절개가 많이 들어가고 라인이 드러나는 옷이라 입었을 때 다소 불편할 가능성이 높았고 밤색과 붉은색이 섞여 호불호도 갈리는 색상이었다.
처음엔 1번과 2번 중에서 고민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여론이 완전히 뒤집혔다. "어차피 우리가 안 입는데 제일 별로인 거 해주자", "나는 못 입는데 후배들만 예쁜 옷을 입게 할 순 없지" 하는 얘기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오기 시작한 것. 몇몇 주동하는 아이들에 의해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고 결국 재학생 투표에서 3번 드림하이 교복이 압도적 1등이 되었다.
졸업 이후, 바뀌기 전 교복과 바뀐 교복의 혼용 기간이 시작됐다. 하나둘씩 드림하이 교복을 입은 후배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동네가 드라마 세트장으로 물드는 듯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수가 많지 않았는데,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이 바뀌기 전 교복을 더 선호해서 언니나 형으로부터 교복을 물려받아서 입는 경우가 많아 교체가 예상보다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결과, 교복 물려주기 나눔 행사가 열리면 졸업생들이 기증하고 간 바뀌기 전 교복을 서로 가져가려고 해서 품귀 현상이 벌어진다는 웃픈 후문을 한동안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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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새 학기 꽃샘추위마저 물리칠만한 소란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선배들이 1년 동안 정기구독을 했던 사설 모의고사가 있는데 우리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사비를 들여서 해야 하는데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
사정은 이러했다. 우리 학교와 사설 교육업체는 한해 전에 계약 연장 여부를 확정받고 그 여부에 따라 공동구매를 하는 조건으로 할인된 가격으로 내년 고3에게 모의고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후배들의 미래를 1년 앞선 선배들이 결정하는 지금과 같은 기묘한 구조가 된 것이었다.
이 계약의 가장 큰 맹점은, 돈을 지불할 당사자가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우리가 제일 분노한 부분도,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학교 대 사설업체와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우리가(정확히는 고3 부모님들께서) 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떠안을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고, 몇 백에서 끝날 문제가 아닌 몇 천 단위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선뜻 책임을 지기엔 부담되는 액수임이 분명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해졌고, 불공정 계약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가 봉기(?) 수준으로 일어나자 선생님들은 부랴부랴 시청각실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상황을 설명했다. 작년 학년이 해놓은 결정이라 선생님들도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고 정말 미안하다며 우리를 어르고 달랬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작년 선배들이 해놓은 일을 책임져야 하는 지금 고3 선생님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결국 3년을 함께해 온 선생님들에 대한 의리로 학교를 한 달 동안 떠들썩하게 했던 모의고사 사건은 겨우 봉합이 됐고, 이후 매주 사설 모의고사가 교실로 배달되어 왔다.
하지만 그 난리 끝에 받아본 모의고사는, 변별력 없는 개념 확인용 문제이거나 현행 수능에는 나오지 않는 옛날 스타일 유형의 문제가 많아 문제의 수준이나 질이 좋지 않았다. 물론 문제지가 도착할 때마다 꼬박꼬박 푸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결제한 비용이 아까워서 어쩔 수 없이 훑어보는 시늉이라도 하거나 아니면 그 시간조차 아까워 아예 문제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버리기도 했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유명하다는 양질의 사설 모의고사를 푸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이름 없는 데다 질까지 좋지 않은 모의고사는 찬밥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뜨겁고도 치열했던 고3 수험생활이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설문조사 하나가 교실로 날아들었다. <이 업체의 모의고사 문제지를 내년에도 받아보시겠습니까?>
작년 선배들의 손에 우리의 운명이 맡겨졌던 것처럼 내년 후배들의 운명이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다. 첫 시작부터 굉장한 마찰이 있었고, 모의고사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기에 당연히 절대다수의 반대로 내년엔 정기 구독이 취소될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는데...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지 않는지. 재학생 70% 이상의 동의로 우리의 직속후배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후배들의 부모님들은 우리가 한탄해 마지않았던 질 낮은 모의고사의 비용을 지불할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아아, 어쩌면 예견된 미래였을까. 이유는 중학생 때와 비슷했다. 나만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는 것. 추천 이유를 쓰는 란에는 "아주 유익했다", "후배들에게 강력 추천한다"라는 주옥같은 말들이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적혀있었다.
두 번의 사건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우리 안엔 작은 악마가 산다는 걸. 다수의 선택이 늘 옳은 건 아니며 대중은 종종 최악의 수를 두기도 하는 존재라는 걸. 없애진 못하더라도 작은 악마가 너무 잦은 외출은 하지 못하도록 문단속에 신경을 쓰자. 스물을 맞이하는 겨울, 뿌옇게 흐려지는 입김을 보며 내린 나의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