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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un 12. 2023

달리는 차 안, 뒷좌석에서 쿨쿨 자는 아빠

어릴 때 가족여행을 할 때면, 항상 혼자서 계속 운전하는 아빠를 보며 꿈꿨던 풍경이 있다. 언젠가 오빠와 내가 성인이 되어 운전면허증을 따게 되면 뒷좌석에 아빠를 태우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운전을 하는 동안 아빠를 쿨쿨 자게 하는 그런 그림. 오빠와 내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고 아빠엄마는 뒷좌석에서 쿨쿨 자는 모습을 언젠가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그림으로 그렸었는데, 그 바람이 드디어 15년 만에 이뤄졌다.





운전면허증은 나도 오빠도 고3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땄다. 나는 2종 보통을, 오빠는 1종 보통을. 평소 별명이 '베스트드라이버(best driver)'인 아빠에게 특훈을 받아 2주가량 맹연습한 끝에 고3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따끈따끈한 운전면허증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 당시 내 친구들이 많이 했던 3일 속성으로 면허증을 따게 해주는 운전학원 강의료가 60만 원 정도였는데, 아빠는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그 덕분에 학원비가 굳었으니 내 공도 있다면서 학원비의 50%인 30만 원을 선뜻 나에게 건넸다. 아니, 면허증을 딴 건 나고 연습하면서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다녔는데 돈까지 생기다니, 이거 완전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인걸? 자격증 뭐 하나 더 따야 하나?! 물론, 아빠와 나 사이에 은밀한 비밀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은근히 우쭐댔는데 나중에 오빠도 똑같이 줬다는 걸 알고 김이 샜긴 하지만. 하하!!(멋진 우리 아빠 최고~)


그렇게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운전면허증을 대학생 때는 쓸 일이 없어 살포시 장롱 속에 넣어놔야 했는데, 이제 20대 중후반이 되고 사회인이 되니 슬슬 다시 필요해졌다. 취업을 하고 출퇴근을 하면서 먼저 운전을 시작한 오빠는 운전한 지 이제 1년 정도 됐는데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이동을 할 때마다 운전 실력을 기를 겸 아빠와 서로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했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오빠는 공감감각도 뛰어나고 센스도 있어서 차분하게 운전을 잘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오빠가 운전을 할 때는 내심 아빠가 편안하게 창밖도 구경하고 잠도 좀 잤으면 했는데, 조수석에 앉은 아빠는 보초병처럼 되려 본인이 운전할 때보다 더 긴장하면서 전방주시를 했다. 편안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해도 아들의 운전은 또 다르게 느껴지는지 아빠의 미어캣 모드는 당최 풀릴 줄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번 5월 마지막 주 부처님 오신 날 연휴에, 거의 1년 만에 주문해 놓은 신차가 나온 기념으로 대전과 세종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빠와 번갈아가며 운전을 하던 아빠가 불현듯 뒷자리에 앉겠다며 나보고 조수석에 앉으라고 했다. 어라? 아빠가 먼저 뒷좌석에 앉겠다고 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보기 드문 그림이네, 라고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얼른 자리를 바꿔줬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달렸을까. 8090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부모님이 어느새 말이 없길래 뒤를 돌아보니 세상에, 아빠가 뒷좌석에 쿨쿨 자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얕게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데 세상 편해 보였다. 운전하고 있던 오빠한테 "아빠랑 엄마 자."라고 속삭이며 말하자, 오빠는 씩 웃으며 "많이 피곤했나 보네."라고 했다. 왠지 모를 성취감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라왔다. 드디어.. 드디어 이런 풍경을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자그마치 15년 만에..!!


가족들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감격에 젖어있는데 새삼스레 차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15년 전,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과는 많은 게 달라져있었다. 수동기어는 컬럼식 기어로, 물리식 버튼은 터치스크린으로, 아날로그 계기판은 디지털 계기판으로, 작디작았던 선루프는 파노라마 선루프로, 순수 내연기관에서 하이브리드 엔진으로. 말 그대로 겉모습 빼고는 거의 모든 게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속도로에서는 크루즈 기능과 차선 이탈 방지, 방향지시등을 켜면 알아서 차선을 바꿔주고 앞뒤 차 간격을 스스로 조절해 주며 과속카메라 위치를 파악해서 미리 속도를 줄여주고 구간단속에선 적정속도를 알아서 맞춰줬다. 15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엄청난 기술의 발전과 함께 내 곁에 성큼 다가와있었다.


조금 있다 돌아보니 아빠는 그새 깨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잠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단 1분이라도 잠을 잤다는 그 사실이 내겐 중요했다. 이번엔 얕고 짧았지만 다음엔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그래서 언젠가는 오빠나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탄 그 순간부터 마음 놓고 푹 자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아빠, 도착했어. 이제 일어나요." 하고 깨우면 "아이고, 벌써 도착했어." 하며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는, 그런 멋진 일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전에 완벽한 자율주행이 개발되어 운전자 없이 모두가 다 같이 푹 자고 일어나도 된다면 더 좋겠지만. 하하.


이제 다음 목표가 생겼다. 내가 운전을 시작해서 오빠와 아빠를 뒷좌석에서 쿨쿨 자게 하고 조수석에 탄 엄마와 재잘재잘 수다 떨면서 가는 그런 그림. 오늘 이 그림은 그려지는 데는 15년이 걸렸지만 다음 그림은 근 2년 내에 그려지기를 바라며. 2년 후엔 어떤 기술의 발전이 있을지 기대되는 그런, 경부고속도로 위에서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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