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목록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할래

by 이수빈
생텍쥐페리의 하루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때는,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 쇼핑 목록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걸 깨닫게 된 시점부터였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고 세상을 보는 남다른 눈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방이나 옷, 책처럼 단번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장인의 아뜰리에>(이지은 저, 이동섭 사진) p. 75


고등학생 때 나는 교내상 헌터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받는 상장이 평균 8~9개였는데, 난 졸업 당시 30개가 넘었으니 한 달에 한 번꼴로 불려 나가 상장을 받은 셈이었다.


하루는, 엄마가 학부모 모임에 다녀왔는데 같은 반 A의 어머니가 물었다고 했다. 딸이 어떻게 그렇게 상을 많이 받냐고, 방법이 뭐냐고. 엄마는 나는 잘 모르겠으니 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얘기했다고 했다.


그다음 날, 학교를 가니 A가 내게 찾아왔다. 그리곤 물었다. 어떻게 하면 교내상을 많이 받을 수 있냐고.


난 두 가지를 얘기해 줬다.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읽고 교내에서 열리는 대회에 최대한 많이 참가하라고. 어떤 비법 같은 걸 풀어줄 줄 알았는지 A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A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중간고사나 수행평가철과 대회가 겹치면 쉽게 포기했고 책은 생기부에 쓸 정도의 딱 정해진 권장도서 내에서만 읽었다.


사실 고등학교 생활 중 바쁘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매주 뭔가 사건은 일어났고, 학교 일은 중요한 개인사와 어김없이 겹쳤으며, 교내대회는 매달 여러 개가 동시에 열렸다. 대회에 출품할 보고서나 원고를 쓰기 위해선 일과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로 급식실에서 밥 먹으면서 초고를 구상하고, 화장실 변기커버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기숙사 사감쌤들 몰래 쓰고,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 머릿속으로 문단을 이리저리 옮겨보고, 저녁급식을 포기하고 컴퓨터실로 뛰어가 20분 동안 원고를 마감했다.


이때 알았다. 쇼핑 목록에 담을 수 없는 게 진짜라는 걸. 남이 쉽게 흉내 낼 수 없고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 남과 구별되는 나의 진짜 실력이 될 수 있다. 판가름 지을 수 있게 하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시도는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래서 여전히 쓰고 읽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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