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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토 Oct 13. 2023

아빠의 외투 속 그 30만 원

'후회'에 대하여

22년 설연휴는 유달리 마음이 조급했다. 설연휴 일주일 전인 1월 말에 울산에서 세종으로 장거리 이사를 했다. 이사한 후 3일쯤 지난 설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에는 시어머니 생신 겸 시댁 식구들이 새로 이사한 집에 모였다. 이사 직후였지만 정말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하는 가족 모임이었기에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댁 모임이 끝나고도,  아직도 제자리를 잡지 못한 이삿짐들이 심란하게 여기저기 놓여있었지만 친정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이를 낳고 10여 년간 친정이 있는 경기도 산본에서 살았다.  아이를 낳고 나는 내내 일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엄마가 도맡아 돌봐주셨고 엄마와 아빠를 모시고 사는 언니집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집보다 더 좋아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2018년에 남편의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후, 2년 뒤  당연히 다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던 친정동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대전 시댁에서 머물고 울산으로의 이사가 결정되면서 친정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러다 그나마 친정과 1시간 30분 거리인 곳으로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가 끝나지 않은 집과 잇따른  일들로 몸과 마음이 너덜해 있었지만 친정 가는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오던 해, 언니네 가족이 엄마 아빠를 모시고 살던 널따란 아파트는 이미 팔린 뒤였다. 야속한 세월의 풍파네 언니네 가족에게 몰아쳤고, 언니는 결국 집을 처분하고 엄마네와 떨어져 각각 작은 집으로 옮긴 상태였다. 불과 2년 전 미국으로 가기 전만 해도 널따란 식탁에 모여 앉아 잘 다녀오라는 따뜻한 응원의 밥상을 차려 받았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찾은 엄마 아빠의 새로운 집은 방 두 개의 작은 아파트로 식탁 하나 놓기도 힘든 작은 거실 겸 부엌이 있는 곳이었다. 22년 설날 아침 언니부부와 조카 두 명, 우리 가족 4명, 동생네 가족 다섯이 그 작은 집에 다 모였다. 모두 서있기도 힘들 만큼 작은 안방에 모여 우리는 차례로 부모님께 새해맞이 절을 올렸다. 빠르게 덕담과 봉투가 오고 갔고 우리는 돌아가며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아빠는 평생 가족 안에 융화되지 못하던 분이셨다. 젊으셨을 때는 건설현장 감독을 하면서 사우디에도 여러 번 다녀오시거나 늘 바빴기 때문에 어린 나의 기억 속에 아빠는 늘 없는 사람이었다. 그 기억 속의 아빠는 한 번씩 외식을 하러 갈빗집에 데려가 서빙하던 분에게 후하게 팁을 주던 사람, 초라한 집에 살면서도 몇 명 안 되는 직원들과 세운 작은 회사에서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운전기사를 두고 다니던 사람, 딸이 공부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상 그 딸이 어떻게 공부하는지는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아빠는 주위에 종종 나의 성적을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내 성적표를 단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었다. 그냥 당신의 딸이 반장을 하고 회장을 한다 하니 저 아이가 못해도 연고대쯤은 가리라는 막연한 환상 속에 사시는 대책 없는 분이셨다.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믿었던 당시에는 아빠는 나에게 한없이 너그러웠기 때문에 크게 관계가 나쁠 일은 없었지만 곧 나의 실체가 밝혀지고 내가  아빠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빠가 나에게 말을 거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선배들을 따라 데모에 나갔다 한 대학교에 갇혔을 때, 엄마는 애가 타 사방으로 연락을 하며 딸이 갇힌 대학교 앞에서 딸을 찾다 TV까지 모습이 나왔지만, 아빠는 사정이 달랐다. 그동안 나의 성적을 부풀렸을 아빠는 지인들에게 내가 간 대학을 솔직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끝내 경찰에 붙잡혀 하룻밤을 묵고 훈방 조치를 받고 나올 때까지 아빠는 주변 누구에게 묻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후, 두어 번 데모질에 미쳐있던 딸내미를 찾아와 억지로 등을 밀로 잡아끌고 가시며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남들이 치켜주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우쭐거리다'라고 말한 뒤로 나는 아빠와의 대화를 아예 끊어버렸다.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의 부모보다 훨씬 젊고 능력 있던 나의 시부모는 나와 당신의 아들이 살 신혼집을 꼼꼼히 살피셨다. 아이들이 살 집이라 신중을 기하시던 예비 시아버지와는 달리 아빠는 몇몇 예비 신혼집을 둘러보며 "아~ 나도 이런 곳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고, 나는 아빠에게 남아있던 작은 연민마저 말라버렸다. 전세금이며 집 살 돈을 척척 보태주시던 시아버지가 결혼 앞둔 딸에게 하는 나의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까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결혼 준비에 보탠 돈의 크기가 비교되어질 때면 나는 더욱더 그 서러움을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야 이기적인 내 맘이 편했으니까. 나는 그리곤 아빠에 대한 마음을 닫아 버렸다. 



부모님께 설세배를 마친 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집에 정리 못한 것들이 아른거렸다.  가족들 사이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는 아빠는 늘 그렇듯 떡국을 몇 숟가락 뜬 뒤 나가 계신 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아빠가 돌아왔다. 나는 얼른 준비한 아빠 용돈을 아무 말 없이 아빠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려고 했지만,  애들 밥도 안 주고 보낸다고 엄한 엄마에게 짜증 내던 아빠의 목소리에 나의 말은 저 깊은 곳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또 그렇게 냉랭히 돌아서 집으로 와버렸고 그게 온전했던 아빠와 나눴던 마지막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일주일 뒤에 아빠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뇌출혈로 처음에는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두 달 가까운 입원 기간 동안 결국 폐렴이 왔고 그렇게 아빠는 3월 말에 세상을 떠나셨다. 병원에 계실 때 찾아간 아빠는 헛소리를 하셨고 간혹 정신이 돌아오는 듯하다가도 엉뚱한 소리를 하셨다. 아프다고 아이처럼 호소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다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다. 딱 한번 우리를 알아보시고 늘 하시던 말을 건네셨는데, '바쁜데 뭘 여기까지 왔냐."였다. 


아빠가 떠나시고 나는 생각했다. 오랜만에 온전히 가족 모두가 모여 마지막 인사를 받을 때까지 아빠는 기다리셨던 걸까? 그 작은 방에서 올린 세배는 우리 모두가 아빠에게 보낸 마지막 인사였다.

장례를 마치고 아빠의 짐을 정리할 때 아빠의 낡은 외투에서 봉투 하나가 나왔다. 한없이 쌀쌀맞던 둘째 딸이 건넨 용돈 30만 원이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장거리 이사에 그렇게 큰돈을 쓰지 않았다면 백만 원 정도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아니 이사에 돈을 썼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몇 십만 원이라도 더 넣었다면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아픈 마음이 조금쯤 나았을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떤 일도 아빠에게 해줄 수 없었다. 


그해 2022년 나는 종종 꿈을 꿨다. 꿈에선 아빠를 다시 만났다. 언제나 그 엘리베이터 앞이다. 나는 아빠의 말라버린 손을 꼭 잡고 조금 더 두둑한 봉투를 손에 쥐어주며 밥 잘 챙겨드시라고 말씀드린다. 살갑게 인사를 하고 아빠의 팔짱을 끼고 곧 다시 보러 오겠노라고 인사를 한다. 


꿈이 깨면 항상 온통 얼굴이 눈물범벅이다. 단 한번 돌아가고 싶은 순간,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되뇌고 되뇌며 나는 늘 그렇게 같은 후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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