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희 Oct 11. 2020

Happy birthday dear my blue

내 쌍둥이인 우울함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의 생일 축하합니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어김없이 불리는 노래. 가사에는 온통 생일인 사람을 축하하는 말로 가득하다. 생일인 사람은 이 노래를 들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케이크 위 촛불을 끈다. 대부분은 그렇다. 하지만 나는 케이크 위에 떨어진 촛농 같은 사람. 생일 초에서 흘러내린 빨갛거나 노랗거나 파란 기름은 툭, 하고 하얀 생크림 위에 떨어진다. 그리곤 생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에이, 못 먹잖아’ 하며 하얀 플라스틱 칼로 도려내고 그 도려진 것이 곧, 나인 것이다. 이렇듯 나는 행복하고 기뻐야 할 생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굳은 기름 덩어리가 되어 내 생일을 보낸다.


 생일에 제대로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태어난 날 내 우울함도 함께 태어났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도 나와 함께 태어났는데 아무도 몰라주니 함께 태어난 나라도 그 사실을 알아달라고 야단이지.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내가 우울함과 함께 태어난지도 몰랐다. 생일을 기다리는 여느 아이들과 같았다. 생일 전날 밤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가족의 축하 속에 입김으로 초를 끄는 일을 기대했다. 좀 독특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내 가족은 항상 생일 전날 밤에 생일 케이크를 자른다. 부모님께 왜 그런 것이냐고 물었지만, 당신들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어느 순간 자리 잡은 가족의 문화겠거니 할 뿐. 어쨌든, 매년 꺼진 초에서 올라오던 연기 냄새, 생일 폭죽의 화약 냄새 따위를 나처럼 어리던 내 우울함도 함께 맡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축하받고 저는 왜 모두가 외면하는지 몇 년간 계속 생각하고 의문을 가졌을 것이고 결국 제 존재를 알려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게 중학생을 기점으로 내 우울함은 저를 점점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년 생일에는 생일 며칠 전부터 내 주변을 얼쩡대다가 생일 당일에 내가 잡을 수도 없게 내 그림자에 숨어서는 그림자로 자신의 숨을 은근하게 흘려보냈다. 그 숨을 이어받은 나는 ‘생일이 되면 생일 따위는 즐기고 싶지 않다’, ‘종일 잠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일상으로 받은 소고기 미역국과 팥 찰밥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메뉴가 되었다. 친구들과 가족의 축하 인사는 정말 고맙지만, 그 많은 축하가 내 우울함에는 닿지 못했고 나와 쌍둥이로 태어난 그 감정은 내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나를 자신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렸다.

 생일로는 모자랐는지 일상에서도 불쑥, 불쑥 나를 집어삼켰다. 한창 나를 자주 찾아올 때는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것이냐고 묻기도 하고 나를 삼키려는 것을 제발 그만두라고 소리도 지르고 억지로 밝은 마음을 가져서 다가오지 못하게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매번 거센 바람으로, 파도로 언제나 나보다 거대한 것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거대해진 감정에 손쓸 힘도 없이 휘청이며 마음을 내줬다. 우울함은 나를 삼키고 나면 저가 나 인척 하며 검고 퍼런 얼굴로 내 생활을 대신했다. 결국, 나는 우울함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울함이 오는 것을 느끼면 ‘그래, 네 맘대로 해라’하며 힘없이 벌러덩 누워버리고 만다. 이런 무력함은 우울함이 떠나고도 며칠은 이어졌다.


 한때는 자주 눈물이 솟곤 했다.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식탁 의자에 앉아서, 심지어 변기에 앉아서도 눈물이 났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나만 휘둘려 버리는지 알 수 없었다. 베갯잇과 옷 소매가 원래 색보다 진해지도록 울면서 ‘아무래도 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만 났다. 그리고 스스로 ‘나 =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을 수없이 찍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계속 인정하니 오히려 덜 울게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그냥 원래 이상해. 어쩌겠어? 우울함을 잘 느끼게 태어난걸.” 물론 이렇게 인정했다고 해서 우울함이 나를 휩쓸지 않는다거나 무기력 대신 활기가 넘친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럴 수는 없다. 우울함은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내 쌍둥이니까 훌쩍 사라지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정하고 달라진 것은 우울함이 올 때 내내 우는 것이 아니라 잠깐 울다가 한숨을 쉬는 정도(아예 울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가 되었고 우울함이 나를 떠날 때는 ‘잘 가라’하며 실없이 인사도 던진다. 그리고 ‘아, 저번 주에는 우울해서 힘들었네’하고는 비교적 빨리 일상으로 돌아온다.




 우울함은 내가 계속 자신을 잊지 않게 노력할 것이다. 생일에는 나를 케이크에 떨어진 촛농으로 만들어버릴 것이고 이따금 찾아와 나를 삼키고 자신의 얼굴로 내 삶을 살면서. 그래도 이제는 나는 원래 우울함과 함께 태어난 사람임을 인정했으니 찾아오는 우울함을 보고는 ‘그래, 너 있는 거 알아.’ 할 수 있다. 다음 생일에는 이상한 사람답게, 저는 생일 축하 안 해준다고 삐져서 성질내는 우울함에 생일 축하한다고 말도 해줘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버랜드는 없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