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찾기 위한 우리의 여정

by 채부장
2025. 8. 16


다시 생각해보면 박완서 작가님은 생전에 정말 많은 글을 쓰셨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엄마의 말뚝>, <아주 오래된 농담>, <나의 아름다운 이웃>, <미망> 등의 장편소설과 소설집은 물론이고, 2011년에 돌아가신 이후에도 10권이 넘는 산문집이 나올 정도로 그녀의 일생 전체가 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상에 예쁜 것> 등의 산문집을 읽을 때면 작가님의 따뜻하고 진솔한 마음을 더 가까이서 느끼는 기분이 든다. 인생이 공허하고 메마르게 생각될 때마다 틈틈이 꺼내읽을 수 있는 박완서의 글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 아닌가.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그녀의 여행기를 묶어 만든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담겨있은 지도 꽤 오래, 다행히 화랑 도서관에서 박완서의 10번째 산문집으로 출간한 이 책을 빌려올 수 있었다. 작가의 따님이 기존에 발간되었던 네팔, 티베트, 몽골, 에티오피아의 여행기에 우연히 찾은 다섯 편의 글을 더해 펴낸 여행 산문집이다. 확실히 국외에서 써낸 여행기의 분량과 묘사가 더 많고 드라마틱한 부분이 크지만, 새로 실린 글들에서는 박완서 선생님의 내면과 과거까지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어 다른 의미로 좋았다. 그 글들 중 특별히 좋았던 몇 구절을 소개해본다.


"올핸 눈이 오는 대로 녹아 도시에선 별로 볼 수 없던 눈이 산엔 풍성하게 남아 있다. 지난 가을에 떨군 잎을 눈 속에 깊이 묻고 서 있는 나무들의 가장귀가 흰 바탕을 깔고 섬세한 부분까지 돋보인다. 그럴싸해서 그런지 가장귀의 선이 아불아불 부드럽게 부풀어 보인다. 시냇가에서 돌을 던지던 아이가 "할머니 내 발이 없어졌어"라고 외치고 깔깔댄다. 눈 속에 발목까지 파묻힌 제 발을 보고 하는 소리다. 그 표현이 재미있어 나도 따라서 소리 내어 웃는다. 감기 들까봐 그만 놀리려도 아이들은 막무가내다. 안 춥단다." (겨울 나무 같은 사람이 되자, 삶의 봄을 만들자 중)


"귀국해서 제일 마음이 놓이고 기뻤던 것도 역시 왁자지껄 들리는 소리가 다 내가 귀만 기울이면 뜻이 통하는 우리말이라는 거였다. 실은 귀기울일 것도 없었다. 우리말의 가락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말의 가락이야말로 나의 놀던 물이었고 놀던 물을 다시 만난 기쁨은 차라리 행복감이었다. 나는 물을 갈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일까? 줄창 말과 씨름해야 되는 직업 때문일까?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미망에서 비롯된 것들 중)


먼저의 구절은 마치 함께 겨울 산에 올라있는 듯 생생하다. 나무의 가지보다는 '가장귀'로 표현하고,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아불아불'이라는 의태어를 택해 그 어감을 조금 더 상상케한다. 조금 더 읽다보면 할머니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웃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쉽게 읽히면서도 눈앞에 그려지는 듯 아름다운 표현력이다. 뒤의 구절은 어떠한가. 외국 여행을 다녀온 직후 들리는 우리말의 생경함, 나는 그것에 종종 거부감을 느끼곤 했는데 작가는 외려 우리말의 가락에서 느껴지는 반가움과 행복감을 표현하고 있다. 오며 가며 스치는 생생한 말들에서 글감을 찾기 때문일까. 작가처럼 생각한다면 수없이 귓가를 스쳐가는 많은 말들 속에서 일말의 즐거움을 길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외로 다녀온 여행기 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글들은 특히 3부에 밀집되어 있었다. 3부는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이라는 부제를 달고 바티칸과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티베트, 네팔 카트만두 기행으로 이루어져있다. 특별히 종교의 색채가 짙은 곳들에 대한 이야기인 때문인지 글을 읽는 동안 왠지 모를 장엄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중에서도 '바티칸 기행'은 박완서 작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조문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과정을 적은 글이다.


"초강대국으로부터 종교가 다른 작은 나라 지도자까지, 왕족 귀족으로부터 침낭을 메고 걸어온 젊은이들까지 한결같이 애도하는 그는 누구인가. 유럽에서는 가난한 약소국에 속했던 작은 나라 폴란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낯선 인물이었다. ... (중략)... 교황님에 대한 애도와 사랑과 긍지를 박수와 깃발을 통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조문객들은 다들 폭발할 듯이 젊고 발랄해서 이런 젊은 피가 가톨릭을 끊임없이 쇄신케 하여 영원히 늙지 않는 종교로 만들리라는 뿌듯한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감동 중)


2005년,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교황의 선종식을 박완서 작가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된 것 역시 큰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덕분으로 슬픔과 환희가 교차했던 벅찬 순간을 다시금 경험해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작가는 이처럼 '전통이 유구한 장엄한 종교의식에 직접 몸담아보고 싶은 인간 심리'에 대해 '존재에 대한 존엄성'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꺼내놓는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수많은 부처님과 달라이 라마를 모시는 티베트, 신들의 도시라는 네팔 카트만두까지 여행기를 이어간다.


'모독'이라는 부제로 써낸 티베트 기행은 박완서 작가의 실망과 씁쓸한 기분이 마음 깊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에게 좋지만은 않은 여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은 한족,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티베트 사람으로 나뉘는 시가체에서 우리의 일제 식민지 경험을 떠올리기도 하고, 티베트의 어린이와 애엄마들이 구걸하느라 본인의 옷소매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랏채라는 도시에서 작가의 일행들이 남긴 음식을 한족 여주인이 한꺼번에 쏟아부어 티베트 걸인들에게 안기는 모습을 보고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관광 행위 자체가 티베트 땅에는 쓰레기만을 안겨주는 모독처럼 보이게 되었으니.


네팔에서도 살아 있는 여신이라는 '쿠마리'를 만나 일정 부분 참담한 기분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 역시 그들의 종교이니 존중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여러 여행기를 읽으면서도 맨 마지막 장에 실린 카트만두에 가장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까닭은 아마 그녀가 이 도시를 묘사했던 방식 때문일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신과 영원에 대한 동경과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고 이 도시에 몸 붙이고 살았나를 도처에서 느낄 수가 있다. ...(중략)... 사원이고 신당이고 궁궐이고 상가고 세월의 더께 아니면 도저히 못 낼 그 참중한 다갈색으로, 또는 시간에 짓눌린 그 삐딱함으로 이곳이 비단 일국의 수도일 뿐 아니라 유서 깊은 고도임을 말해준다."


"네팔 여행은 상대방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신기해하며 인정해주고 같이 즐길 수가 있어 좋고,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낭비를 와장창 하고 나면 책임감과 약속에 얽매인 사람 노릇과 공해로 질식할 것 같은 몸과 마음이 당분간은 견딜 수 있는 생기를 회복한 것처럼 느껴져서 또한 좋다. ...(중략)... 네팔에서 어쩌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는 걸으러 온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 (신들의 도시 중)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위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왜 네팔 카트만두에 가고 싶어졌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가. 카트만두 여행은 아껴놨다가 어느 순간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 꺼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과 마음을 가지게 해준 박완서 작가님의 글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더불어 짧은 속초 여행길에서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아주 좋은 날씨와 함께 이 모든 감상들을 온전히 글로 남길 수 있는 나의 안온한 일상에도 마지막으로 감사하며.


8월 16일, 속초 보드니아 카페에서 완독.


‘아불아불‘이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와 챗GPT에게 도움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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