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어느 비오던 저녁, 나에게 불시착한 책

by 채부장
25. 10. 20


길었던 10월 연휴의 마지막 즈음이었을까. 딱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멀쩡히 일하고, 남는 시간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요가도 했는데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어떤 날은 어두컴컴한 거실 소파에서 널부러지듯 앉아 하루종일 넷플릭스만 봤다. 분명 요가를 예약해둬서 가야하는데, 머리속으로는 알면서도 손가락은 자꾸 취소 버튼만 찾았다. 며칠이 몇 주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사람이 절로 뾰족해졌다. 다른 이의 피로함을 받아주지 못했고, 누군가 툭 던진 한 마디에 신경이 곤두서서 날카롭게 굴었다. 친한 사람들에겐 내 괴로움을 토로하며 그저 감정만 앞세웠다.


저번주 월요일에는 비가 왔다. 퇴근을 하고 동네를 정처 없이 걷다가 책방 '지구불시착'에 갔다. 주위가 온통 깜깜한 와중에도 무이하게 불이 켜진 책방 모습에 홀렸으리라. 꽤 외롭고 비참한 기분이어서 이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만한, 따뜻한 책을 만나고 싶었다. 매대에 놓인 책방 주인분의 추천 메모를 들춰보았다. 어떤 제목이 마음에 팍 꽂혔다. 그래, 지금은 이 책이다. 이소연 시인의 산문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는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불시착에 책 재고가 없어서 결국 화랑도서관 신세를 졌다)


책을 읽으며 '시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시인은 사람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 혹은 그 세상마저도 사랑하는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이다. 이소연 시인은 기다림을 사랑하고, 이야기를 사랑하고, 동네책방을 사랑하고, 도봉을 사랑하고, 옆에 있는 이들을 사랑한다. 만물에 대한 그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가 내 생채기 난 마음에도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특별한 존재 같다가도 어떤 구절에 닿으면 한없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생각하는 법이 궁금해요."라는 말 때문이다. 서울 서대문역 근처 식당에서 소주에 돌솥밥을 먹는 내내 생각했다. '나 어떻게 생각하지?' 그러고 보니, 내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생각 좀 하고 말해."다. 과연, 생각이 말보다 언제나 먼저일까? 의도도 없고 목적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시시콜콜하게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는가? (p.98)


시인조차도 생각 좀 하고 말하라는 이야기를 듣다니. 약간의 자괴감을 담아 요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입 밖으로 쏟아진 말들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기를 몇 번. 돌아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각이 많은 채로 보냈다. 늘 머리가 무거웠던 기분이다. 내가 뭘 좋아하지,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돈을 많이 벌어야하는데, 더 열심히 해야하는데. 생각이 많으니 자연스레 말도 많아졌다. 중언부언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시간도 많았다. 늘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졸지에 심각하고 우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시 가슴에 손을 얹고 읊조려본다. 산뜻하게 살자. 산뜻하게 살자.


덧붙여 시인은 조그만 것들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는 이다. 매듭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에게 '매듭'은 범죄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케이블 타이의 연상이고, 삼십 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는 리본 묶기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소연 시인의 매듭은 다르다. 그녀의 매듭은 아버지가 묶어놓은 배추의 새끼줄 매듭이고, 농사라는 매듭이고, 나아가 관계와 운명에 다다르게 하는 특별한 매개체다.


"글 쓰는 일이든, 사람 살아가는 일이든, 잘 매듭져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매듭' 같은 쪽지를 책상 위에 붙여두었다. 매듭이라는 말 참 좋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말이다. 매듭 속에는 생각하는 사람과 농사짓는 사람이 함께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아버지가 쓴 이 '매듭'은 쉽게 풀 수가 없다. 그래서 아름답다. (p.91)


시인의 일상을 나누어주어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남들보다 더 애정이 많은 사람, 더 깊게 고찰하는 사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녀를 보며 '쓰는 대로 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정하고 천진하게 글을 쓴다면 이소연 시인은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 역시 책방 지구불시착에서 얻은 위로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따뜻한 온기 덕에 다시 이 글을 쓰고 있다. 왜 쓰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나의 자기성찰적 글쓰기이며, 앞으로의 글쓰기가 자기 치유로까지 확장되길 바란다. 나의 글들을 통해 탱탱볼처럼 바닥을 가볍게 치고 올라가길.

임솔아 작가는 자신의 첫 단행본 책날개에 자신이 쓴 글들이 대신 말해 줄 것이라는 약력을 남겼다. 이 한 줄의 약력에 대해 홍일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아름다운 약력"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자기가 쓴 글들이 대신 말해주는 약력이라니, 영원에 머물던 신비로운 시간이 바로 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쓴 글들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널 지켜 줄게." (p.26)


그 날의 지구불시착 책방, 기분 좋은 지구불시착 추천책 메모
공리단길 오피셜커피에서 읽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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