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처럼 알밤같은 단어들을 모아 성실하게 써내려가는 시인의 일상
회사 후배였던 소진-이자 요가 선배님-이 어느날 불쑥 책을 선물해주었다. 이번 알쓸별잡에 출연하시는 시인 안희연님의 책이라며, 너무 좋았다는 본인의 감상을 더해서 말이다. 기분 좋게 읽었으면 좋겠다는 소진의 말처럼, 이 책 ‘단어의 집’ 덕분에 며칠의 출근길이, 또 혼자 먹는 이른 저녁마저 은은하게 즐거울 수 있었다. 행복을 나누어준 소진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쓴다.
내 인식 속의 시인은 마치 거인같은 존재다. 얼마 전 한강 작가의 ‘흰’을 읽으면서도 느꼈듯이,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단어들을 포착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혹은 아무나- 절대 될 수 없는, 초능력을 가진 비범한 존재. ‘단어의 집’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도 안희연 시인의 비범함에 놀랐던 바다. 시인인 본인을 ‘단어 생활자‘로 정의한 것에 우선 감탄했는데, 자신에게 찾아와 준 단어들로 이렇게 멋진 책 한권을 빚어내다니.
하지만 이러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안희연 시인은 아주 친절하게-그리고 기꺼이 허리를 숙여-나에게 눈을 맞추어 주었다. ‘단어의 집’은 말 그대로 안희연 시인이 아끼고 아껴놓았던 소중한 단어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다. 그녀의 삶에 우연히 내려앉은 여러 단어들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의 삶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반짝이는 것들. 한 챕터 한 챕터가 넘어가며 각각의 단어를 만날 때마다 점점 그녀가 친근해지고 종국에는 마치 우리가 친구인 것처럼 느껴진다.
안희연 시인은 총 마흔 다섯가지의 단어를 세 장에 걸쳐 분류해놓았다. ‘성냥갑에 딱 하나 남은 성냥 같은 말’, ‘홀로 짓는 표정 같은 말’, ‘나의 작은 말들의 놀이터’. 세 장의 제목만 읽어보아도 벌써 마음에 파도가 일렁이는 듯하다. 각 장에 나열되어 있는 단어들을 우선 눈으로 훑어보는데, 대다수가 모르는 단어다. 시인이라고 해서 꼭 순우리말 단어들만을 고른 것은 아니며, 꽤 높은 비율로 외래어-외국어-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게 읽었던 단어, 그리고 안희연 시인의 이야기는 이렇다.
‘적산온도’라는 단어는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생육 일수의 일평균기온을 적산한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단어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면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가 있는데 봄이 되면 식물들이 몸 안에 온도를 ’저금‘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 차면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를 만나고 시인 역시 자신에게 ‘저금’되어 있던 말들을 하나둘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희연아, 환히 지내라. 희연아, 너는 너를 좀 더 사랑해야 하겠다”는 말과 같은 것.
‘내력벽’은 ‘건물의 하중을 부담하는 구조체’를 말한다.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에도 내력벽은 함부로 허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그녀가 포착한 것은 사람에게도 그 자신을 짓기 위해 설계된 내력벽이 있다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그것이 ’부재의 기억‘ 같은 것이며, 이 내력벽은 ’모든 걸 부숴도 부서지지 않는 최후의 보루, 영혼의 핵심‘으로 남는다.
시인의 집 근처 식빵 전문점에서 만난 ‘탕종’이라는 단어도 있다. ‘이스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반죽 단계에서 따뜻한 물을 넣어 밀가루가 충분히 수분을 머금게 하는 것’. 시인은 탕종 기법으로 만들어진 빵을 보며 삶을 떠올린다. ‘찢어지더라도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질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충분한 회복력을 지닌 삶’. 그리고 이 단어는 마치 선물처럼 안희연 시인의 작은 주문이 된다.
개인적으로 깊게 남은 세 가지 단어만을 소개해보았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각각의 단어들을 만났을 때 독자 역시 자신의 삶을 한발짝 되돌아 볼 수 있음을. 나를 꽃피우게 해주는 ‘적산온도’에 이르기까지 내게 저금된 따뜻한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절대로 부서지지 않고 나를 지탱해줄 ‘내력벽’은 무엇일까. 지금의 내 삶은 ‘탕종’ 식빵처럼 유연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울까.
나에게도 분명,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단어, 나의 것이 있다고 믿는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의 단어와 같을 수 있겠지만, 내 삶 속에서의 그것은 분명 독특한 의미로 기능할 것이다. ‘단어의 집’을 읽으며 나만의 단어장을 작성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희연 시인이 먼저 써버렸기 때문에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겠지만-이 책을 써낸 그녀의 상상력과 끈질김이 부러워지는 대목이다-내 생애를 특별히 추억할 수 있는 하나뿐인 단어집이 될 것이다.
주객전도처럼 시인의 산문집을 먼저 접하게 되었지만, 이로써 안희연 시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니 이제 그녀의 시집을 읽을 차례다. 시인이 특히 ‘점거’하고 싶었던 단어, ‘여름’이 성큼 앞다가와 있으니 아무래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부터 읽어봐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