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조차 챗gpt가 더 잘 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 <경험의 멸종>만큼 많이 메모를 달아놓은 책은 없었다. 그만큼 공감한 부분도 많고 생각할 지점도 많았다는 뜻이리라.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틴 로젠은 이 책을 통해 말 그대로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고’ 있는 현 시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비판을 제시한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기술이 전세계를 집어삼킨 지금,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직접 경험’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저자가 나고 자란 미국 뿐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녀가 선택한 여러가지 예시에 정곡을 찔린 듯한 기분이 든 것도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오며 같은 경험을 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지금부터 <경험의 멸종>을 읽으며 적었던 생각의 단상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를 본 적이 있는가(아주 재미있는 영화고 지금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모든 인터넷망이 일시에 끊기고 정보가 차단되며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는 현대식 호러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당장 우리에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일이지 않은가.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SNS를 확인하고 잠자는 순간까지도 유튜브를 틀어놓는, 소셜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는 나에게는 더욱 무서운 가정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도 중독적인 인간이 되었나. 분명 학창 시절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에 일상의 피드를 올리지 않으면(특히 여행의 경우에는 더 심해지는데) 손가락에 쥐가 날 것 같은 현상에 대한 답은 이렇다. SNS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 삶이 얼마나 의미있는 지를 선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너무 사실이라 부정할 수조차 없다. 더불어 SNS 플랫폼은 ‘순수한 사교성을 정량화된 인기로 대체’하며 서열 매기기의 중요성을 드러내놓고 보여준다. 이처럼 <경험의 멸종>이 지적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은 마치 나를 지켜보고 쓴 것만 같다. 작은 글씨로 쓰인 설명 따윈 읽지 않고 약관과 조건에 동의를 해버리는 것, 거의 자동적으로 친구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 미술관에서 10초 만에 그림을 관람하는 것 등. 나의 직접 경험보다 타인의 경험-여행 영상, 운동 영상, 리액션 영상-을 소비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도 말이다. 언제부턴가 지루함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버스를 기다릴 때, 지하철을 탔을 때, 차 안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조차 스마트폰에 손을 뻗는다. 어쩌면 이것은 생각과 상념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경각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유튜브나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책을 읽으려고 하고, 억지로라도 손글씨를 쓰고, 요가와 달리기로 직접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 때문일 것이다. 러닝 열풍이 불고 서울 국제 도서전의 티켓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매진되는 걸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인 듯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07년의 서강대에서는 직접 원고지에 글을 써서 독후감을 제출하게 했었다. 그 때 이후로는 원고지 자체를 만져본 적도 없으니 당시에는 구태의연한 일처럼 느껴졌으나 돌아보면 소중한 기억이다. 책이 말하는 것처럼 ‘글쓰기에는 뼈와 살, 펜과 종이라는 실체가 포함’되어 있음을 인지하면 더욱 그렇다. ‘필기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과정이 아니며, 문자 언어의 구성 요소인 글자를 기억하는 과정’이고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은 타이핑보다 아주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리를 기술이 대체하는 시대가 올까. 다시 말해 기술이 종교가 되는 시대 말이다. 이미 역술인의 자리는 챗gpt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하다. 프롬프트에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10초도 안돼 나의 사주를 주르륵 읊어주니. 바야흐로 기술에게 운명을 묻고 앞으로의 미래를 점쳐달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인간은 나약하고 비이성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지할 무엇인가를 찾고 그것에 기대려고 하지 않는가. 현재의 인간이 가장 의지하는 존재는 아마 스마트폰일 것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이 찾는 것. 언젠가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그것 역시 나를 마주보고 똑바로 응시하는 때가 오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내 표정을 인식하고 분석하는 찰나의 순간, 우리는 진짜 표정을 숨길 수 있을까.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누구에게나 투명한 세상이 되겠지만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저자 크리스틴은 현 시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이 책을 쓴 듯하다. 일견 맞는 이야기다. 기술의 발전을 무분별하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의 시선을 가질 것, 규제의 필요성을 인식할 것.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약 600만년 전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DNA에 새겨진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을테니. 우리가 가진 ‘인간성’을 좀 더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직접 경험이 주는 쾌감일테니 말이다. 자연에게서 압도당하는 경험, 사랑하는 사람과의 포옹, 무언가를 만지고 접촉하며 느끼는 물성, 몸을 직접 움직이는 데서 얻는 상쾌함, 맛있는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에서 느껴지는 감각. 결국 우리가 행복, 만족감이라고 표현하는 감정은 주로 직접 경험에서 오는 것이지 않은가. 이 직접 경험을 좀 더 충만하게 느낄 수 있도록 기술의 도움을 얻는다면-예를 들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비행 시간을 줄인다던가-, 그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증가시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토록 소중한 직접 경험, 인적 경험에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경험이 ‘사치품’이 된다면 말이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 저렴하고 쉬운, 기술로 매개된 경험만 남게 될 것이다. 경험이 멸종되는 시대보다 더 두려운 것은 특정 계층만이 직접 경험을 소유하는 미래다. 따라서 기술과 플랫폼, 기기를 규제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 모두가 직접 경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본인의 몫으로 지키는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와 정책,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서평을 쓰기 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챗gpt에게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에 대해 2,000자의 서평을 써줘’라고 프롬프트를 입력한다면 군더더기 없이 분석적인 서평이 나올 것이다.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꽤 많은 시간을 들여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고 글을 썼는가. 그게 바로 ‘직접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정 시간(일주일이 넘도록 틈틈이 쏟은 시간), 특정 공간(지하철, 카페, 집을 넘나들었다), 육체적 체험(책을 넘기고 수첩에 글을 쓰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도)을 통해 온전히 나의 것으로 체화하는 경험 말이다. 비록 인공 지능에 비해 그 결과물이 부족할지언정 그것은 ‘내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이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존재라고 여긴다. 다시 한번 눈을 들어 몸과 마음, 우리가 창조해낸 그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