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살아 있음’을 정의하는 법

by 채부장
2025. 8. 30


발리로 여름 휴가를 떠나기 전, 민영 감독님이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빌려주었다. 그러니까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난 일이다. 그녀가 아끼는 책인 것 같아 조심히 읽고 빨리 돌려주고 싶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여행길에 가져가지 못했고 결국 돌아와서도 꽤 오랜 시간 음미하며 읽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은 지금도 여운이 깊이 남는다. 이 책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이라는 프랑스 여성 작가의 작품이며, 첫 페이지부터 시처럼 줄줄이 쓰여진 문장에 탄복하며 읽게 되었다. 프랑스 작가여서 그런 것인지, 프랑스어를 번역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의 문체 자체가 그러한 것인지 처음에는 헷갈렸지만 책에 빠져들어 그 문장들에 익숙해지다보니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짧고 간결한 묘사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앞서 말한 것처럼 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많은 부분에 괄호를 사용하여 단어와 문장을 보충하고 있다는 점도 독특했다. 마치 작가의 사고 회로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젊은이들은 <밴> 안에 있다(그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코 소형 트럭이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꿉꿉한 습기, 오돌토돌 표면에 달라붙어 사포처럼 엉덩이를 갉아대는 모래, 소금기 머금은 고무, 갯벌과 파라핀 냄새, 쌓여 있는 서프보드, 서핑 슈트 무더기(보드 팬츠 혹은 후드 달린 두툼한 웨트 슈트), 장갑, 부츠, 병에 든 왁스, <리시>. 셋 모두 어깨를 맞대고 앞 좌석에 앉았다. 원숭이처럼 새된 소리를 질러 가며 허벅지 사이에 손을 비볐다. 얼어 뒈지겠네. 그러고는 비타민이 첨가된 시리얼바를 씹고(다 먹으면 안 돼. 이따가 파도가 우리를 삼키고 나면 우리도 뭔가 삼킬 게 있어야지), 콜라 병과 튜브에 든 네슬레 연유, 달고 말랑말랑한 사내아이들의 비스킷 페피토와 샤모닉스를 서로에게 돌렸다.”


여기서 묘사되는 젊은이들은 주인공인 시몽 랭브르를 포함한 19살의 세 친구, 크리스토프 알바와 조앙 로셰다. 셋은 이른 아침부터 모여 서핑을 했고 돌아오는 길에 밴, 그러니까 그들의 소형 트럭이 기둥에 충돌하는 큰 사고를 맞는다. 나머지 둘은 안전 벨트를 하고 있었지만 중간 자리에 앉았던 시몽은 그대로 밖으로 튕겨져나와 병원으로 이송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시몽과 그의 몸을 둘러싼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된다. 시몽을 처음 맡게 되는 소생의학과 의사 피에르 레볼, 그를 돕는 간호사 코르델리아 오울, 시몽의 어머니인 마리안 랭브르, 아버지인 숀, 여자친구인 쥘리에트, 시몽의 장기 이식 담당자인 토마 레미주, 시몽의 심장을 이식받게 될 클레르 메장 등.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쓰여지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시점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 생각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생과 사의 그 얇은 막을 날카롭고 세심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놀랍지만, 생명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시몽과 같은 사고를 당해 뇌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지만 모든 장기와 신체는 살아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책은 이렇게 대답한다. ‘심정지는 더 이상 죽음의 징표가 아니며 이제부터 죽음을 입증하는 것은 두뇌 기능의 정지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더 이상 사고하지 못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의 폐위와 두뇌의 대관식(상징적 쿠데타. 혁명).’ 그렇다면 두 번째 물음. 시몽의 살아 숨쉬는 장기들이 다른 이들의 몸 속으로 각각 흩어져 그가 텅 비게 된다면, 시몽은 예전과 같이 그 자체로서의 시몽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규정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의 존재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육체? 정신? 혹은 기억? 그가 맺었던 사람들과의 관계? 시몽의 어머니인 마리안 역시 이런 질문을 맞닥뜨린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그녀의 아들의 단일성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의 특별한 기억과 이렇게 분산된 육체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의 존재, 이 세상에 비추어진 그의 모습, 그의 혼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이 부글거리는 기포처럼 그녀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시몽의 얼굴이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다. 말끔하고 온전하다. 그것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 아이다. 그녀는 깊은 안도를 느낀다. 밤이 밖에서 석고 사막처럼 불타오른다.”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정의가 점점 더 모호해진다. 시몽과 반대로 뇌는 살아있지만 신체가 기능하지 못한다면? 혹은 뇌의 기능 중 일부분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죽은 상태라면? 곧 일어날 일이겠지만 인공 장기가, 인공 근육이, 심지어 인공 뇌가 우리의 신체를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시몽과 클레르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장기를 재활용해 다른 누군가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완전하다고 믿었던 한 인간의 존재가 해체되고, 분열되었다가, 교체될 수도 있는 것이다. 클레르가 본인의 심장 대신 시몽의 심장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그녀 또한 온전히 클레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책의 제목을 다시 곰곰이 읽어 보게 된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여기서 살아 있는 자는 시몽인가, 클레르인가, 혹은 둘 모두인가.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맘껏 음미하기. 시몽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육체 그 자체로 부서지는 파도가 되고, 밀려가는 파도가 되고, 행복의 절정을 맞는 것. 책을 읽는 며칠 동안 요가를 할 기회가 두어번 있었다. 어깨 서기를 하면 헐떡거리며, 또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배를(혹은 장기들을) 바로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다. 그 때 이상하게도 이 책 생각이 났다. 아직은 온전히 나의 것인 육체와 장기와 뇌의 살아있음을 더 느낄 것,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할 것.


“시몽 랭브르의 살아 있는 장기에 적합한 대상자들을 찾고 있는 이 순간에, 병든 몸에 그 장기들을 분배하고 있는 이 순간에 수천 개에 달하는 폐들이 저곳에서는 다 같이 부풀어오르고 수천 개에 달하는 간들이 맥주를 흠뻑 머금고 수천 개에 달하는 신장들이 육체의 노폐물을 동시에 걸러내고 수천 개의 심장들이 들뜬 분위기 속에서 펌프질을 해대는 걸 상상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의 파편화에, 이 공간의 현실의 절대적 연속성에 소스라친다.”


이 책은 인간의 죽음과 삶을 다루고 있고 여러 명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의 형식 외에는 표현되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민영 감독님이 책을 빌려줄 때 즈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연극으로도 봤었다고. 검색 사이트에 찾아보니 19년부터 24년까지 무려 사연을 올릴 만큼 꽤 유명한 작품이었고 심지어 1인극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지금 받은 이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오감으로 느끼게 되면 얼마나 더 좋을까. 아마 굉장히 몰입해서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살아 있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책에 감사하며, 새롭게 오를 연극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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