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카페에서 파트타임 바리스타로 일할 때였다. 카페 동료들과 회식을 한 후, 집에 돌아와 조금은 노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원래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자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날 따라 아무리 잠을 청해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회식 때 먹었던 두툼한 삼겹살, 옆에 앉아있던 예쁘장한 알바 동료 등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빠졌다 하던 중, 갑자기 7! 이라고 누군가 내게 외쳤다.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9!를 다시 소리쳤다. 뒤이어 13, 24, 41, 45!를 연달아 불렀다.
그리곤 영화처럼, 바로 눈을 떴는데 출근 준비할 시간인 새벽 5시 30분이었다. 당시 카페 오픈 타임에 일하고 있었기에, 늘 6시 전에 집을 나서곤 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6개의 숫자를 생각했다. ‘뭐지, 꿈이었나? 내가 잠을 자긴 한 건가. 왜 숫자가 나온 거지? 숫자 6개라… 어, 어, 어?’ 나는 확신했다. 이건 신의 계시라고.
현실로 돌아와 급하게 씻고 출근했다. 그날따라 사정없이 바빴다. 알바 동료 한 명이 그날 몸이 안 좋아 출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커피 내리다가 바나나주스 만들고, 머핀 굽고 프렛즐 꺼내고, 정신없었다. 전날 밤 불가사의했던 그 숫자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다음 날, 점심 피크시간대가 끝나고 카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조각케이크를 한입 베어 먹고 버리러 가는데, 으악! 극심한 통증이 내 손끝에 찾아왔다. 카페 문을 닫다가 손가락이 끼여서 피가 철철 나고 있던 것이다. 일단 휴지로 손가락을 감싸고 지혈하는데, 갑자기 떠올랐다. 7 9 13 24 41 45! 그 숫자들이 말이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행하지 않아서 천벌을 받고 있구나!’ 다급하게 조퇴하고 근처 슈퍼로 달려갔다. 샀다. 로또를.
7 9 13 24 41 45. 신이 주신 숫자들을 OMR카드에 적었다. 로또 용지를 지갑 깊숙이 넣고 집에 돌아왔다. 바로 노트를 펼치고, 로또 1등이 되고 난 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쭉 내리 적었다. 눈독 들였던 고가의 청바지 사기, 클럽에서 VIP로 놀기, 세계일주 시작하기 등 20대 초반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적었다. 별의별 생각들을 하며 일주일을 기다렸다. ‘당첨되고 부모님께는 거짓말을 해야 하나? 초등학생 때 세뱃돈처럼 엄마가 보관한다며 그냥 가져가 버리진 않을까? 알바는 바로 그만두어도 되겠지?’
대망의 토요일 저녁 8시 40분. 로또 방송을 틀었다. 유럽행 비행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젊은 나이에 일확천금을 얻으면 그 결말이 좋지 못하다고 하던데, 역시나 대부분의 당첨금은 엄마께 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세계일주는 1억이면 충분할 테니까. 행운의 볼들이 사정없이 돌아가더니 당첨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숫자들을 하나하나 숨죽여 지켜보았고, 끝내 7개의 모든 당첨볼과 운명처럼 직면했다. 손에 들려있는 로또 용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다. 게다가 신이 주셨던(사실 그냥 개꿈) 6개 숫자 중에서, 단 하나도 맞은 게 없었다. 로또 용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렇게 스펙타클했던 나의 로또 헤프닝이 끝났다.
그 후로도 이따금 로또를 구입한다. 사실 당첨에 대한 기대 보다는, 5천 원으로 일주일간의 설렘을 산다고 해야겠다. 복권은 일주일 동안 꿈과 희망을 준다. 당첨금으로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퇴사 후 세계일주 떠나기’다. 그리고 당분간은 책 보고 글 쓰고 음악 하며 한량처럼 살고 싶다. 로또는 주변 사람들과 좋은 대화 주제가 되기도 한다. “친구야, 이번에 당첨되면 너 내가 차 바꿔준다.”, “대리님, 이번에 1등 되고 제가 부장님한테 멋지게 한 소리 하고 퇴사할게요.” 그리고 일할 때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서, 신명 나게 업무를 할 수 있다.
금요일 퇴근길 잠실역 8번 출구에는 긴 행렬이 있다. 1등 16번, 2등 68번 당첨의 쾌거를 기록하는 로또명당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두 바퀴 세 바퀴까지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다. 평일 동안 열심히 일한 그들에게, 일주일간의 행복이 깃들길 기원한다. 나도 한 장 사야겠다. 7 9 13 24 41 45, 그때 그 숫자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