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같이 일하게 된 동료는 갖은 먹거리를 싸오며 감사하게도 내 입을 즐겁게 해 준다. 이번엔 그녀가 아주 비싼 간식을 샀다며 게다가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어디서 봄직한 옥수수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개당 3달러나 주고 샀다며 잘 쪄찐 옥수수를 툭 잘라 반을 건넸다. 그녀는 귀한 옥수수를 구한 게 신이 나는지 아이처럼 들떠 있었고 나는 심드렁하니 한참 동안 잊고 있던 옥수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옥수수를 개당 3달러나 주고 사 먹는 그녀가 그다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찐 옥수수만큼 따뜻한 마음은 받아두었다. 나는 옥수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있음 먹고 없음 말고 하는 식으로 옥수수를 찾는다. 특히, 호주의 옥수수는 샛노란색의 부서질 듯 부드러운 알갱이가 조밀조밀 박혀서 아주 달콤한 맛을 내는 스위트콘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전자레인지에 10여분이면 바로 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맛이다. 그래서 아이들 간식으로 좋고 샐러드며 고기 요리며 정말 안 끼는 데가 없을 정도로 찾는 호주 국민 간식이다. 처음엔 이국적인 옥수수를 먹는 흥미로움과 그 천연의 단맛에 매료되어 자주 먹었지만 지금은 그 관심도 많이 사그라져서 요리할 때나 가끔 사게 된다. 호주의 달콤한 스위트콘과는 달리 오늘 만난 쫄깃하고 구수한 우리네 옥수수를 한입 먹는 순간,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동료가 건네 준 옥수수는 한국에서 할머니가 자주 드시던 강원도 찰옥수수와 똑같았다. 갈색의 알갱이가 듬성듬성 박혀있고 한입 물으니 쫀득쫀득하니 정말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강원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한국의 힘든 역사를 고스란히 겪으신 분이고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지 너희들은 모른다고 항상 말씀하셨던 기억이 났다. 항상 힘이 있고 강한 할머니는 아흔이 다되신 나이에도 고추장을 직접 만드시고 된장을 직접 담가 드시는 열정이 있는 분이셨다. 그 높은 옥상을 하루에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시며 오로지 자식들 나눠주실 생각에 힘든 일도 척척 해내시는 분이었다.
어릴 적 옥수수가 한참인 늦여름, 할머님 댁에 가면 밥상 한편에는 항상 찐 옥수수가 풍요롭게 있었다. 나와 내 남동생에게 삶은 옥수수를 건네주시던 할머니의 그 따뜻한 손길이 기억난다. 하지만 가끔은 찐 옥수수를 받아먹는 척하다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을 슬쩍 꺼내 바꿔먹던 소심한 반항도 했었다. 그 자연스러운 구수한 맛을 그때는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우리가 남긴 옥수수를 아까워하신 나머지 당신은 치아가 튼튼하다며 옥수수를 알알이 뜯어 드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작년에 코로나가 심각할 때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원에 입원하셨다가 가족도 잘 만나보지 못하시고 할머니는 그렇게 어이없게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그 푸근한 밥상과 그 무덥던 장마 끝 옥수수 삶는 냄새를 이제 만날 수 없다 하니 가슴 한켠이 저려온다. 부드럽고 달콤한 호주 옥수수에 길들여 있다가 다시 만난 할머니의 찐 찰옥수수! 가스레인지에 한솥 푹푹 삶아 쪄내야 그 은은하고 구수한 맛을 알알히 느낄 수 있는 그 옥수수가 이제는 좋다. 할머니의 인생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여서일까?
할머니 부엌에서 손자 손녀 간식으로 김 펄펄 내며 쪄지던 그 소박한 우리들의 간식이었던 옥수수! 그 구수한 내음에 할머니의 푸근한 미소 그리고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 헛헛하게 묻어나는 저녁이다.
사진출처: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