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터링 없이 내뱉는 법
문득 자전거를 타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얼마나 쉽고 편한 일일까? 사실 다정하고 착하고 좋고 바른 사람으로 사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무언가를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상대방이 어떤 말을 했을 때 많은 것을 고려하고 가공해서 말을 뱉어야 한다는 점이 특히 그런 것 같다.
이 사람이 어떤 것을 싫어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고,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등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 마치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오픽 시험 같다. 화자의 의도를 기가 막히게 파악해서 그럴싸한 답변을 들려줘야 한다. 이 과정은 정말 상상만 해도 피곤한데, 나는 줄곧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있다.
센스 있는 답과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거의 다음날 첫 예능에 출연하는 신인 아이돌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런 건 내가 정신적인 건강과 체력이 받쳐 주었을 때나 가능하다. 요즘처럼 내 앞 길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해 빌빌 거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뱉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시한폭탄 같이 언제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르는 단어의 조합들을 눌러 삼키곤 한다. 이번에 친해진 동네 친구가 있다. 내가 다니던 미용실에 새로 온 스탭이었는데 나이를 들어보니 동갑이었고, 한 블록 뒤에 살고 있어서 자연히 친해졌다. 그러던 중 그녀가 이별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를 위로할 겸 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중이었다.
그의 남자 친구는 누가 들어도 굉장히 피코(피해자 코스프레)의 달인이었고 알게 모르게 내 친구를 탓하고 있었다. 듣다 보니 기가 차고 정말 쌍욕과 직설적인 문장들이 내 머릿속과 입 앞을 부유했지만, 차마 뱉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엔 그녀가 아직은 정리가 덜 된 듯싶었고 꽤 미련이 남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전 남자 친구 욕을 해봤자 기분도 안 좋을뿐더러 더 이상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너의 잘못이 아니고 그가 이상한 거라면서, 최소한의 험담과 위로와 응원을 담아 말을 했고 약 1시간이었지만 나는 조금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저런 말 들어주고 같이 편들어주고 욕하느라 3시간 가는 줄 몰랐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려 자전거에 올랐고 흘러가는 노래들을 들으며 내가 많이 지쳐있구나 실감했다. 사람들과 행복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소모적인 일로 다가온 것이다.
스트레스받을 때는 사람으로 힐링하던 내가 이제는 그게 지친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최고 밖순이가 집순이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