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식어가는 동안, D+85
등산에 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건 비밀인데, 등산을 할 때는 매번 힘들다. 그리고 이것도 비밀인데, 등산을 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가도 멋진 풍경을 만나면 발이 마음보다 앞서 걷기도 하고, 흐르는 땀 위로 시원한 바람 한 번 불어오면 없던 기운이 솟아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분량만큼의 힘듦을 오롯하게 내 발걸음으로 채워나가는 일이다. 정상석에 표시된 서너 자리 숫자만큼의 높이에 오르는 일. 하나의 산을 오른다고 해도 길은 무수히 많고, 하나의 길을 오른다고 해도 사람마다의 방식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산을 타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왕왕 생각하곤 한다.
- 「산타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오늘은 문득, 아기를 키우는 일도 등산과 다를 바 없단 생각이 들었다. 매일 힘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고, 힘들어 죽겠다가도 아기의 웃음 한 번이면 기운이 솟아난다. 아기는 정해진 분량만큼 울어내고 엄마는 오롯이 도닥여야 한다. 한 자리의 체중이 두 자리가 되고, 두 자리의 신장이 세 자리가 될 때까지 견디며 감내해야 한다.
아이를 낳은 후 세 달이 조금 안 된 오늘 건강검진을 했다. 어느 때보다도 자신 없는 몸상태였지만 작년에 건너뛰었기 때문에 올해는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4시간 공복 상태로 병원에 가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몸상태를 체크했다. 임신성당뇨가 있었기 때문에 내분비내과 연계 오더로 당부하검사도 했다. 2주 뒤면 날아들 그간의 건강 성적표가 걱정이다.
건강검진 덕분에(?) 남편이 휴가를 쓰고 아기를 보았다. 오후에는 시댁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적당한 시간에 검진이 끝나 집으로 돌아갔고, 아기가 마침 분유를 넉넉히 먹어주어 편안하게 출발했다. 시댁에서 푸짐하게 차려진 점심을 먹는 동안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돌아가며 아기를 봐주셨다. 정말이지 사랑을 담뿍 받았다. 아기가 추울세라 폭신한 겉싸개로 둘러싸고 안아주셨는데, 처음에는 아기는 너무 더우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다가 어른들의 사랑방식이라 생각하고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집에서는 잘 안 자던 아기가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는 잠도 잘 잤다. 바닥에 내려두었는데도 30분 정도를 더 자서 놀라고 대견하기도 했다.
집에 와서 분유를 더 주고, 놀아주고, 안아주고, 재웠다가, 목욕을 하고, 마지막 수유를 하고, 밤잠에 들게 하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나니 이제 정말 우리가 합이 맞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기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고, 내가 능숙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기가 제멋대로 울어도 '그런갑다. 잘 달래주면 또 지나가겠지.' 하게 됐고 나의 미숙함에 스스로 종종거리지 않게 됐다.
산에 오르면서 높고 가파른 오르막에 힘들어한 적은 있었지만 뒤돌아 내려온 적은 없다. 저기에 왜 바위가 있냐고, 왜 이곳에 계단이 있냐고 불평한 적도 없다. 그냥 그 산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정해진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아기를 키우면서 어려움이 생기면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견뎌보려 한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해하다 보면 어느새 쑥 자라 있는 아기를 만나게 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