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식어가는 동안, D+83
1.
"여보세요?"
"아 네~ 결혼정보회사인데요. 혹시 만나시는 분 있으실까요? 저희는 ……."
"저 결혼했어요. 애도 있고요."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부연 설명을 붙이며 대답했다. 처음엔 결혼한 지 2년 반이 지났는데 결혼정보회사에서 전화가 오니 좀 웃겼다. 그리곤 곧 실감했다. 아, 나 벌써 여기까지 왔네. 이제 어딘가에서 설문조사를 하면 이렇게 체크하는 때가 됐다.
[30대 중반, 기혼, 자녀 유]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시간의 흐름을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람들도 마음껏 만나며 정신없이 지냈으니까. 그런데 24시간 아기와 함께하다 보니 나이 먹음이 조금씩 실감 난다. 가장 와닿을 땐 아기의 말간 얼굴 옆에 내 얼굴을 갖다 붙이고 거울을 바라볼 때다. 아기가 너무 귀여워 한참 바라보다가 잠깐 눈동자가 옆으로 이동하는 순간 '오. 주름이 이만큼 늘었군' 하게 된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아이고 손이 참 예쁘다' 하셨다. 엄마도 종종 내 손을 쓸어보고는 '아이고 예쁘네' 했다. 작고 뭉툭한 내 손이 뭐가 예쁘다는 건지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아기의 손을 가만 붙잡고 있으면 그 마음이 절로 이해가 된다. 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촉촉하고 통통하고 앙증맞은 손이 나의 조금은 세월을 담아낸 손가락을 잡고 있으면 기분이 참 이상하다. 아마도 점점 더 자연스럽게 나이 듦을 실감하며 살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누구보다 아기의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는 일을 많이 하게 될 테니 시간이 흐를수록 외할머니와 엄마의 말을 하나씩 이해해 가겠지.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날도 기대된다.
2.
감기 기운이 조금 물러나고부터는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갑자기 추워졌던 날씨는 다시 조금 따뜻해졌고 산책하기에 딱 좋아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경량패딩을 입고, 아기띠 위로 톡톡한 담요를 두르고 나선다.
평소 아기띠를 메면 바로 잠에 빠져들던 아기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기띠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세상 구경을 했다. 30분 산책 중 15분을 두리번거리기에 '이나야. 가을이 왔어. 저기 잎이 노란색 빨간색이 됐지? 원래는 초록색이었는데. 이제 곧 낙엽이 되어서 떨어질 거야. 오늘 날씨가 따뜻하다. 그래도 바람은 차갑지?' 하며 아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집 주변을 천천히 걷는데, 갑자기 정육점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싶었다. 아기를 낳고 미역은 여기저기서 챙겨주셔서 많이 있으니 소고기를 좀 사면되겠다 싶었다. 아기에게도 '오늘 엄마가 미역국을 좀 끓여볼까 하는데, 이따 집에 가서 혼자 잠깐 놀 수 있지?' 하고는 양지를 조금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임신했을 때도 갑자기 미역국이 끓이고 싶더니. 간단하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으니 이럴 때 더 생각이 나나보다. 친정엄마와 산후관리사님이 계실 때를 제외하고는 사실 끼니를 거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우유를 넣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셰이크나 샐러드, 과자, 냉동식품 같은 것들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은 남편이 차려주는 밥이나 배달음식을 먹었다.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싶었지만 뭘 차려서 먹을 여유는 없었고 전자레인지를 돌려 먹는 정도만 할 여력이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오랜만에 솥에 밥을 안쳤고, 오늘은 미역국을 끓였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여유가 생겨나는 건가 싶은 맘이 들었다. 어쨌든 건강을 놓지는 말아야지. 내년엔 다시 스카이런도 참여하고, 10k 마라톤도 뛸 수 있게 조금씩 몸의 활력도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