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을 상회했지만 결국은 현재에 머무는 개인의 고뇌
제목의 두 소설은 국내에서 절판되었다. 아리 코헨을 주인공으로 한 3부작 소설이지만 3부는 한국에서 번역되지 않았다. 3부를 보지 못해서 처음엔 아쉬웠지만 끝을 몰라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쿰란은 사해에 접한 사막의 사암 절벽에 위치한 동굴 지역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1946년 무렵 사해 사막을 지나던 양치기 소년은 우연히 인근 동굴에서 양피지에 필사된 수백 장의 구약 시대 이야기(사해사본)가 담긴 항아리들을 발견한다. 그곳이 쿰란이다. 유대인의 한 분파인 에세네인들의 공동 주거 지역으로 밝혀졌다.
소설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를 바탕으로 역사와 추리와 사랑을 엮어, 한 개인이 인간이었기 때문에겪어야 하는 고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십수 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이미 절판상태라서 중고로 구해 몇 번을 읽었다. 거의 해마다 읽지만 읽을 때마다 십수 년 전의 마음이 살아 돌아와 감정만 남고 상세가 남지 않는다.
“시작만 해도 괴롭다”, 언젠가는 어느 메모에 이렇게 남겨 놓았다. 하지만 올해도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2천년을 떠돌은 그의 고통의 흔적은 결국 현재로 돌아와 필사의 행위를 통해 개인의 고뇌로 정리되고 남겨지며 인식된다. 글자에 남겨진 숨결을 통해, 말이 만들어지고 글이 형성되며, 그들을 통해 기억되고 존재하는 것들.
기억의 순서란 감각의 순서, 존재의 순서라 할 수 있다. 기억이 자신의 활동 영역을 찾고, 자기 존재의 부재와 비현실성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현재 속에서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 성찰과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현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지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진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고로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언어엔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 없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려면, 미래형이나 과거형을 사용해야만 한다. 당신의 언어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절대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싶다. 두 개의 시제를 혼합하여 엉큼하게도 과거를 현재로 만드는 복합과거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나는 그 닫힌 발음으로 보나, 단일성과 전체성으로 보나, 단순하게 만료된 사건을 나타내는 단순관거를 더 선호한다. 이것은 과거 시제 중에서도 진짜 과거이다. 분석되는 현재는, 과거 속에 표현되는 현재처럼, 마치 거기서 자신의 조건을 발견하기나 하듯 과거 쪽으로 돌아간다. 과거는 모든 것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 있는 성경 속에 현재형은 없다. 미래와 과거가 거의 동일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가 미래를 통해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시제를 만들기 위해선 미래 시제에 vav란 문자를 덧붙이면 된다. 그것을 'vav 전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글자는 '그리고'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미변화시킨 동사를 읽기 위해선 '그는 했다'나 '그리고 그는 할 것이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항상 두 번째 해결책을 취했다. 성경은 미래형으로만 표현되며, 전혀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다가오는 시간에 일어날 사건들을 영원히 예고만 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란 없으며, 과거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너무 거셀 때는 말을 해야 한다. 언어가 불탈 때는, 그래서 우리 자신마저 불타버릴 것 같은 때는 말을 해야 한다.
최소한 나는 이 글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 그리고 이 단어들이 섬광들로, 과거의 내가 아닌, 되어야 할 나, 미래의 나를 말하고 싶다. 나를 읽을 줄 아는 자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분석을 통해 종합을, 주석을 통해 그 시초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해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텍스트에 비추어 나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문자들은 하나의 세계요, 각각의 단어들은 하나의 우주다. 각자는 자기가 쓰고 읽는 단어들에 책임이 있다. 독서할 때 각자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 책 속의 문장은 문제 시 삭제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