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아래 자작하게 타고 남은 젊은 날의 기억(원제: 화산 아래에서)
글짓기팀의 마지막 숙제였던 진초록이란 주제로 글을 짓다가 이 책에 대해 남겼던 짧은 감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또 읽었다. 다시 읽으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운동신경은 없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소설은 담담하게 흘러가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이상한 일이다.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 소설에서 묘사한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생기고, 정체가 모호한 이상한 그리움도 생긴다.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
1.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유치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숨이 다 하기 전, 나지막하게 타는 화톳불 같이 표현한 주인공의 마음과 이제 막 어떤 관계가 시작될 때의 어색하고도 기쁜 마음을 표현한 저자의 방식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젊음은 유치한 게 맞는데- 다시 본 지금의 생각이다. 딱히 일렁이는 게 없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일렁이는 것은 주인공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어디를 향한 것이었나.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뜨거워지는 마음.
모른 척하고 싶거나 모르고 싶었거나 정말 알지 못했거나- 미지근하게 자리하던 마음.
젊어서 힘들겠다- 제목이 기억 안 나는 드라마에서 배종옥이 누군가에게 던진 얘기다.
그런데 유키코의 웃음은 그냥 그 자리에 스며 나와서, 누가 받든 말든 상관없어 보인다. 그것은 유키코의 특이한 온화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했다.
알지 못했을 마음이었을 것이다. 미지근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던 그 마음.
2. 건축은 무엇인가. 건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건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저자는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했던 걸까. 주인공이 아스플룬드에 대해 단조롭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부분을 읽으며 이 책은 어쩌면 저자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의 축인 노년의 섬세한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모델은 요시무라 준조이며, 소설 속의 아스카야마 교회는 그가 설계한 산리즈카 교회가 모델이라 한다.
작년 말에 도쿄에서 단게 겐조가 설계한 세키구치 성당을 갔었다. 성당은 안팎으로 상당히 인상적이다. 미사 준비 중이어서 내부를 깊게 못 본 것이 아쉽다. 세키구치 성당의 내부는 소박한 듯 강렬했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의 희미한 빛이 스며든 어둑한 공간, 원초적이어서 더 압도적이었던 신보다도 신의 아들의 기리는 공간 또는 신이 세상을 멸하던 순간 유일하게 살아남은 종들을 태웠던 전설 속의 배.
소설 속 아스카야마 교회의 모델이 된 요시무라 준조의 산리즈카 교회는 1954년 설계한 wooden modernism시리즈의 5번째 건물이라고. 전쟁 후 가난한 농촌의 기독교 신자들이 십시일반 하여 마련한 한정된 공사비로 설계를 의뢰한 목사의 “영적으로 충만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며, 성찰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비전을 전통적인 일본의 재료와 기법, 거기에 현대적인 원칙을 곁들여 완성했다.
요시무라 준조와 단게 겐조는 건축의 형태적 지향에 있어서 대척점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리고 사진으로 느낀 산리즈카 교회와 직접 경험한 세키구치 성당이 주는 느낌은 나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비전이 설계자의 기술과 철학을 통해 그 의미를 형태로 구현한 것이 건축이라면 그 지향점은 정말 다른가. 표현방식의 다름이지 지향점- 필요로 하는 이들의 비전을 구현한다는 본질의 차이는 없다.
요시무라 준조와 단게 겐조-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신을 대하는 방식을 떠나, 신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두 건축가가 무로부터 만들어 낸 공간은 종교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보편성을 보여준다.
한때 반짝거리는 게 전부였던 교회 건축이 온갖 사건과 사고와 실수와 잘못을 극복하고 회복해 가고 있는 과정에서 소박하고 단순한, 여백이 강조된 선과 면을 활용한 형태로 변화해 간다. 단순한 형태의 종교 건축물은 랜드마크로, 관광지로 그 역할을 확장해가고 있다. 신자도, 비신자도 누구나 한 번쯤은 둘러볼 수 있는 건축. 종교가 전해야만 하는 가치의 보편성이 이제야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한다.
3.,,,,,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얼마 전에 읽은 책에 만두 가게 에피소드가 있다. 만두피를 만들며 남은 반죽은 다시 합쳐서 다른 만두피를 만든다- 반죽이 필요한 대부분의 음식이 그렇다.
나눗셈의 나머지를 생각하다 남은 반죽에 걸쳐 얼마 전에 본 책까지 넘어가게 되는 것.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던 반죽의 조각들처럼 기억에 남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일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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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고 깨끗하게 쓰인 소설이다. 누구나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
+ 내가 건축가 이름 몇 개 외운다고 건축을 안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모른다고 할 수도 없긴 하다.
건축을 잘 모르긴 해도 형태와 공간에 대해 느끼는 것은 있다. 나는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폐쇄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무조건 개방적일 필요도 없지만, "건축"이라는 멋진 단어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종교든 건축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에게 보이도록 설계된 모든 것 ("나"를 포함하여)은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실패한다.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전문가의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또 다른 저자 얘기. 저자는 소아 천식을 앓았던 것 같다. 이 책과 그의 다른 책,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원제: 빛의 개)에도 소아 천식을 앓았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
+ 소설 속 경합 대상인 국립현대도서관 부지가 아오야마 묘지 근처로 설정되어 있다. 작년 12월에 아오야마 묘지 근처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 유발 하라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교회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 산리즈카 교회는 나리타에 있다. 다음에 동경을 가게 되면 세키구치 성당과 산리즈카 교회, 그리고 두 명의 건축가가 설계한 다른 건축물도 구경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