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이 : 서점 여행자 (4)

나의 서점 아저씨

by 일주일의 순이

등대가 있는 방파제, 오징어배들이 모여있는 작은 항구 그리고 바닷가 옆을 점령한 조선소가 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농사를 짓던 젊은 아빠는 용접을 배웠고 배를 고치는 곳에 나갔다. 엄마는 집주인아줌마 소개로 선장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미역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우리는 빛이 들지 않는 작은 방에서 살았다. 가끔 선장 집에 가면 내 또래 여자아이 방에서 놀았다. 동화책으로 가득한 그곳은 신기하고 아늑했다. 집에 돌아오니 밝은 방 속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그곳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책을 사달라고 졸랐지만 오랫동안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는 해, 집 앞 버스 정류장 옆에 서점이 생겼다. 서점 입구 쪽에는 중고등학생 문제집이, 안쪽에는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었다. 집에 읽을 책이 없었던 나에게 그곳은 환한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아이들 틈에서 문제집을 보다가 슬그머니 구석으로 들어가서 소설을 꺼내 읽었다. 서랍 모서리 쪽에 숨으면 내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서점은 하굣길에 늘 가는 장소가 되었다. 책을 사지 않고 읽으려니 마음이 콩닥거렸다. 책 정리로 바쁜 서점 아저씨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책을 읽던 자리에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날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아저씨에게 물었다.

" 아저씨, 저 의자 앉아도 돼요? "

" 네 자리야. 바닥이 차갑잖니."

얼굴이 붉어졌다. 아저씨는 나를 보고 계셨던 것이다.


어느 날 버스에서 내리자 아저씨가 나를 서점으로 불렀다.

“ 왜 요즘 안 오니? 걱정했단다.”

“ 그냥... 학교가 늦게 끝나서요.”

“ 가게를 닫기로 했단다. 혹시 네가 헛걸음할까 봐.”

나는 놀란 눈으로 아저씨를 보았다. 아저씨는 책꽂이에서 ‘폭풍의 언덕’을 꺼내 선물로 주셨다. 자주 읽던 책이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잘 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서점은 식당으로 바뀌었다. 서점 간판이 내려진 날 집에 와서 누워 버렸다.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곳이 보기 싫어 한 정거장 전에 내려걸었다.


"참 좋은 인연이야. 귀한 인연이고 가만히 보면 모든 인연이 다 신기하고 귀해. 갚아야 돼. 행복하게 살아. 그게 갚는 거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이다. 상처뿐인 여자 주인공에게 이선균은 진짜 어른이었다. 요양원에 할머니를 모실 수 있는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하며 어둠뿐인 지안에게 처음으로 빛을 보게 했다. 할머니는 이 인연이 고맙다며 아저씨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드라마를 보면서 서점 아저씨가 떠올랐다. 책 읽는 즐거움을 준 공간 그리고 수줍음 많았던 소녀에게 의자를 내어준 사람. 나에게도 고마운 아저씨가 한 사람 있었다. 덕분에 나는 거실 가득 책을 쌓아두는 책부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