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순이 : 서점 여행자 (8)

그녀는 여행 중

by 일주일의 순이

산티아고 여행 후기를 들려주는 모임을 간 적이 있다. 화곡동 골목 안쪽 1층에 있는 새벽감성 1집. 서점지기는 산티아고 순례를 한 뒤 책을 내고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다. 이곳저곳 자유롭게 여행하다가 서점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지 않냐는 질문에 서점지기는 잠시 쉬는 중이지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호프집은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동아리 정기모임에 선후배가 뒤섞여 앉았다. 서로 술잔을 부딪히고 총무는 안주를 주문하기 바빴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 잘 못 된 거니? 넌 세상을 얼마나 잘 안다고 그래.”

은주 선배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새하얀 얼굴, 짧은 머리를 한 선배는 강렬한 눈빛으로 맞은편 남자 선배를 노려 봤다. 그리곤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신입생 환영회 때 같은 짝이었던 선배는 통통한 내 모습이 귀엽다며 웃었다. 우리는 같은 강의를 들으면서 친해졌다. 다른 선배는 또 시작이냐며 잠시 은주 선배를 쳐다볼 뿐이었다.


학생식당에서 외국인과 앉아 있는 은주 선배를 보았다. 식판을 들고 선배에게 갔다. 프랑스에서 온 친구라며 남자를 소개했다. 갈색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그는 언뜻 보아도 나이가 들어 보였다.

"유럽 배낭여행에서 만난 친구 쟝이야. 아시아 여행 중인데 나를 보러 왔대."

인사를 하고 밥을 같이 먹었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바라보는 눈빛은 따뜻했다. 은주 선배가 떠나자 동아리 친구가 옆으로 다가왔다. 저 선배는 외국인 아저씨도 만나냐며 비아냥거렸다. 은주 선배는 쟝을 데리고 캠퍼스 곳곳을 누볐다. 곧이어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의가 끝나고 후문에서 빨간 티코를 탄 은주 선배를 만났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차에 타라고 했다. 차에 탄 순간 강릉으로 가지 않겠냐고 했다.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은주 선배는 씩 웃으며 운전대 방향을 틀었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려 밤 12시가 되어서야 강릉 경포대에 도착했다, 4월의 밤바다는 쌀쌀했다. 그녀는 편의점에 가서 소주와 새우깡, 불꽃놀이 세트를 사 왔다. 소주를 한 잔 마시니 몸에서 열이 났다. 은주 선배는 하루하루 사는 게 엿같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벽에서 삐져나온 대못으로 여긴다고 했다. 자꾸만 제자리로 들어가게 꽝꽝 치기만 한다고. 그 말이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술에 취한 선배가 불꽃놀이도구를 들고 텅 빈 해수욕장을 뛰어다녔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새. 검은 바다 위로 날아갈까 봐 선배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도서관으로 은주 선배가 찾아왔다. 시험 잘 보라는 이야기와 함께 시원한 캔커피를 건넸다. 긴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다. 언제 돌아올 거냐는 말에 ‘글쎄’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이 떨렸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주 선배는 학교에서 사라졌다.


나는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친구들과 2박 3일 여행을 가고 싶었으나 남편의 곤란한 표정에 당일치기를 다녀왔다. 새롭게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아이 봐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었다. 커피를 타서 식탁 위 세계지도 앞에 앉았다. 은주 선배와 갔던 경포대 바다가 생각났다. 아이가 어릴 때는 내가 바다 위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집에 박혀버렸다. 그래서 늘 생각하곤 했다. 선배를 쫓아갔다면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내 마음속 그녀는 아직도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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