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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Sep 20. 2024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광합성, 생태계

자연 속에는 한 곳에 뿌리내리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처음 자리 잡은 그곳에서 평생을 머문다. 비바람이 몰아치든,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든, 그들은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그 자리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바람을 막아주는 우산이 되어준다. 그들은 바로 식물이다.


인간이 사라진다 해도 생태계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공백은 금세 다른 생명들이 메우고, 생태계는 여전히 안정된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구의 주인'이라고 자부하지만, 식물의 존재에 비하면 우리의 위치는 보잘것없다. 식물 없이는 생태계가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다. 식물은 모든 생명의 토대를 이루는 생태계를 떠받치는 주춧돌 같은 존재이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세상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숨은 요리사와도 같다. 식물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산화탄소를 생명에 필요한 에너지로 바꾼다. 이 에너지는 풀을 뜯어먹는 동물들에게로 흐르고, 그 동물들은 다시 다른 생명에게 생명의 바통을 넘겨준다. 칼 세이건은 광합성을 '우주적 요리'라 칭했다. 식물은 태양 에너지와 이산화탄소라는 재료를 가지고 당과 산소라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광합성의 무대는 식물 세포 안에 있는 작은 공장 엽록체다. 엽록체는 빛을 포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초록의 작은 주머니다. 동물의 세포에는 엽록체가 없기에 우리는 태생적으로 누군가를 잡아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비운의 운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식물은 다르다. 그들의 잎이 초록으로 빛나는 것은 바로 엽록체 덕분이다. 엽록체는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색광과 적색광 이 두 가지 빛을 주로 선택하여 에너지로 사용한다.


광합성의 과정은 이렇다. 식물의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랫면에는 미세한 구멍들이 있다. 그 구멍을 '기공'이라고 부르는데, 그곳을 통해 공기가 자유롭게 드나든다. 기공을 통해 들어온 이산화탄소는 뿌리에서부터 열심히 끌어올린 물과 엽록체가 모아둔 태양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그 만남 속에서 광합성이 일어나고, 이산화탄소는 포도당으로 변신한다.


정리하자면, 이산화탄소와 물, 그리고 태양 에너지가 만나 포도당과 산소를 만들어 낸다. 이때 생성된 포도당은 화학 에너지를 지닌 귀한 에너지원이 된다. 식물은 스스로 태양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들고, 이 에너지를 태양을 이용할 수 없는 동물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마치 물이 흐르듯, 에너지는 태양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다시 동물로 흘러간다.


식물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고 땅이 척박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태양을 마주하고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생명을 이어간다. 식물은 세상에 자리를 내어주고 그 자리를 떠받치며 우주적 요리사처럼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들이 없으면 지구의 에너지 흐름도 생명의 노래도 멈추고 말 것이다.


광합성을 하는 생물은 식물만이 아니다. 최초로 광합성을 시작한 생물은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다. 이들은 식물이 등장하기 약 20억 년 전 지구에 먼저 나타났다. 남세균은 원핵생물로 식물보다 원시적인 구조를 지니며, 크기도 식물 세포보다 훨씬 작다. 하지만 이 작은 생물이 처음으로 광합성이라는 놀라운 마법을 보여준 주인공이다. 남세균의 마법은 지구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인류 탄생의 초석을 마련했다.


사실, 식물이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것도 남세균 덕분이다. 식물 세포에서 광합성이 일어나는 이 엽록체의 정체가 바로 남세균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세포 속에 세균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고, 약간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주 오래전 독립적인 한 박테리아가 있었다. 어느 날 이 박테리아는 남세균을 삼켰다. 남세균은 그 박테리아 속에서 살아남았고, 그 후 둘은 공생 관계를 형성하며 동거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적응하고 진화하며, 마침내 하나의 통합된 세포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바로 '세포 내 공생설'이다. 이 과정은 엽록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를 생성하는 미토콘드리아도 원래는 독립적인 세균이었으나 세포와의 공생을 통해 세포의 일부가 되었다. 동물과 식물 할 것 없이 모든 진핵생물은 이렇게 세균을 품고 공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엽록체가 과거 독립적인 생명체였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다. 첫째, 엽록체는 세포의 핵과는 별개로 자체 DNA를 지니고 있으며 그 DNA는 남세균의 DNA와 거의 동일하다. 둘째, 엽록체는 세포가 분열할 때와 별도로 독자적으로 분열한다. 셋째, 엽록체는 이중막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는 원시 세포가 남세균을 삼키는 과정에서 세포막이 내막과 외막을 겹쳐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식물이 광합성을 한다기보다 식물 세포가 삼킨 남세균이 그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식물은 남세균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안락한 거처를 제공하며 묵묵히 그들과 함께 지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이어가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과 함께, 그들의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식물은 세포 내의 작은 생명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며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간다. 이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때로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이해하거나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광합성 생물의 등장은 지구의 생태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이 만들어낸 산소는 대기 중에 서서히 쌓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산화탄소는 포도당으로 변환되며 대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들었다. 산소의 축적은 기존의 생태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산소가 나타나기 전,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생물들은 혐기성 생물들이었다. 그들은 호흡에 산소를 사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산소를 독으로 받아들였다. 산소에 노출되면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이들은 더 이상 기존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고 산소가 없는 깊은 땅속이나 동물의 내장 속으로 서식지를 옮겨야 했다. 반면, 산소를 호흡에 사용할 수 있는 호기성 생물들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산소의 축적은 새로운 생명체들의 탄생과 번영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소 분자는 태양의 강력한 에너지를 받으면 분해되고 재결합하여 오존을 형성한다. 오존은 산소 원자 세 개가 결합한 특별한 분자다. 이 오존이 성층권에 쌓여 오존층이라는 보호막을 형성했다. 오존층은 태양에서 오는 강력한 자외선을 차단하며, 생물들이 바다를 떠나 육지로 올라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광합성 생물의 등장은 지구의 역사를 바꾼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들 덕분에 지구는 훨씬 다채로운 생태계를 갖추게 되었다.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생명체들이 번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광합성 생물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작은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는 실로 거대하고도 놀라웠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태양의 빛을 받아들였을 뿐이지만 그 결과 지구의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채로운 생명체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땅 위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는 그들이 무심코 일으킨 이 변화의 공로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식물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겠다거나 육지로 생물을 불러오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광합성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진화의 결과, 광합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고,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었을 뿐이다. 그렇게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지구는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이는 인간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말을 남겼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과 책임을 다할 때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질서와 조화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지 권위적인 역할 분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할 때, 사회 전체가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고 평화롭게 유지된다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지구의 생태계를 보자. 겉에서 보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조화는 무질서 속의 질서, 마치 그물망과도 같다. 먹이사슬보다는 '먹이 그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생태계는 단순한 직선적 관계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네트워크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생물과 생물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바위와 생물처럼 무생물과 생물 간의 관계도 포함한다. 바람, 햇빛, 이슬, 안개 같은 자연 현상도 생태계의 중요한 일부다. 생물들은 이런 자연 현상을 자신의 생존 기작에 맞춰 활용한다. 먹이 그물이 촘촘할수록, 생태계는 그만큼 더 안정되고 건강해진다. 자연에는 불필요한 개체군이 없다. 모든 것이 그 나름의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질서는 인간이 강제로 부여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질서는 외부에서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식물이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광합성을 하며 산소를 내뿜는 것처럼, 인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로 더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사회도 자연과 마찬가지로 각자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도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할 때, 무심히 펼쳐지는 그 조화 속에서 더 크고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국가의 질서를 위해 이렇게 말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즉,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이루어지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지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천하가 평화로워진다는 뜻이다. 공자는 사회의 번영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수양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국가의 발전처럼 거대한 일은 비범한 접근이 필요할 것처럼 보이지만, 공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마치 식물이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면서도 생태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때로는 우리가 스스로를 광활한 사막의 모래 알갱이처럼 느낄 때가 있다. 거대한 집단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보며, 없으면 그만인 미약한 존재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단순히 숫자로 따지자면 80억 인구 중 1명일 뿐이니 그 존재감은 보잘것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맺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한 개인의 영향력은 결코 미약하지 않다.


1955년 미국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을 떠올려 보자.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백인을 위해 버스 좌석을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 결과 그녀는 체포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전역의 흑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사건은 마틴 루터 킹이 이끄는 흑인 민권 운동으로 이어졌고, 미국 사회는 인종 차별 철폐와 평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물결을 맞이하게 되었다. 로자 파크스라는 한 개인이 작은 돌을 던졌을 뿐이지만, 그 파문은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다.


종교의 창시나 사상의 전파, 문화의 형성도 개인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를 들어,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는 과학 혁명의 기틀을 마련했고, 수많은 문화적 변혁은 한 사람의 사상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책 <원씽(The One Thing)>에 등장하는 '도미노 이론'도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도미노는 자신보다 1.5배 큰 도미노를 넘어뜨릴 수 있다. 만약 첫 번째 도미노가 2인치 크기라면, 매번 1.5배씩 커지는 도미노를 넘길 때 57번째 도미노는 지구에서 달까지 닿는 크기가 된다. 처음부터 거대한 도미노를 쓰러뜨리려는 것은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작은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것에서 시작하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작은 노력, 작은 행동이다. 그 작은 행동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존재감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미약하지 않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인종차별 철폐, 환경 보호 등 인류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이런 거대한 문제를 앞에 두고 개인의 작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의 말처럼, 개인의 노력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당신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커다란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개인의 수양과 성실한 노력이 가정과 사회를 넘어 국가와 세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가족과, 친구와, 지금 자신이 속한 모든 집단에 발휘해 보자. 그 작은 시작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접근 방식은 자연의 이치와 어울리지 않는다. 권력자가 위협과 강압으로 질서를 세우려는 방식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진시황의 진나라나 몽골의 원나라가 그랬듯, 공포로 통제된 질서는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결국에는 무너지고 만다. 인간 사회는 그 복잡성 때문에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사회는 수많은 인과 관계가 동시에 작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를 강력한 규칙과 규제로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무모하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완벽한 계획 경제를 설계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 위에 세워졌지만, 최근 뇌과학 연구는 인간의 선택이 비합리적일 때가 많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경제학이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 준다. 경제라는 분야에서도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통제적 접근이 효과적이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반대로, 아래서 위로 향하는 접근은 더 자연스럽고 효과적이다. 생태계의 질서처럼 말이다. 생태계는 각 개체군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자연스러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지금까지도 가치 있게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이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개인은 가능한 한 자신의 자본을 국내 산업 지원에 사용하고, 그 산업이 최대한의 가치를 생산하도록 지향하면서,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을 최대한 늘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얼마나 그것을 증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안전과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 그는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하도록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끌립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그는 실제로 그것을 증진하려 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킵니다."


한마디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진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 개념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산업혁명의 시기와 맞물려, 보이지 않는 손은 초기 자본주의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 잡았고, 이를 채택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국가의 개입이 적고,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중시하는 자본주의가 중상주의적 국가 통제 경제보다 더 효과적임을 입증해 주었다.


자연의 이치가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은 삶의 많은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를 이끌어야 할 순간이 오면, 우리는 자연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중심의 가부장적 가정이 화목하기 어려운 이유도 자연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절대왕정보다는 민주주의가 더 발전된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안정된다.


리더의 역할은 구성원들에게 질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책임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경제든 국가든 자연스럽게 질서가 유지되고 번영을 이룰 수 있다. 자연이 그랬듯 우리의 사회도 강제와 통제가 아닌 자발성과 책임감에서 시작될 때, 진정한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생태계를 이루는 일원들은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 각자가 조화를 이룰 때 생태계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식물 중심으로 생태계를 살펴봤지만 사실 모든 생명체는 생태계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생태계의 생물들은 크게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로 나뉜다.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관계는 생태계의 균형과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생산자는 태양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식물들이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와 물을 당으로 바꾸며,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바로 생태계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식물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태양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한다. 그들은 말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다른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 에너지를 이어받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소비자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들이 그들이다. 초식동물은 식물을 먹어 에너지를 얻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먹어 에너지를 이어받는다. 서로 다른 소비자들은 서로의 에너지를 나누며 또 다른 소비자의 생존을 돕는다. 생태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먹이 그물 속에서 상호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순환의 마지막 고리가 되는 이들이 바로 분해자다. 버섯이나 세균 같은 균류들이 분해자에 속한다. 분해자들은 죽은 동식물과 그들의 배설물을 분해하여, 영양분을 다시 토양으로 돌려보낸다. 분해자들은 생명이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없으면, 영양분의 순환은 멈추고, 생태계는 서서히 파괴될 것이다.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는 이렇게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생태계를 하나의 거대한 순환체로 만든다. 이 관계 속에서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그 안에서 자연스러운 질서가 형성된다. 한 생명체의 존재가 다른 모든 생명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도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각자의 역할을 다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자본가와 노동자, 스승과 제자, 의사와 환자, 정치인과 대중… 이러한 관계는 서로에게 필수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상대의 역할이 쓸모없다고 단정 짓고, 당장의 이익이나 불만에 사로잡혀 그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감정을 품기도 한다. 이는 마치 식물이 자신을 뜯어먹는 사슴을 악당으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식물의 바람대로 초식동물이 사라진다면 생태계는 어떻게 될까?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육식동물도 먹이를 잃고 사라지며, 그에 따라 분해자들도 먹이가 줄어들어 개체수가 감소할 것이다. 결국, 분해자가 내놓는 영양분이 줄어들면 그 피해는 다시 식물에게 돌아온다. 생태계는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긴밀한 연결망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인간사회도 그렇다. 어떤 관계 속에서 상대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생태계의 섭리가 그러하듯'이라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이유로 그 자리에 있으며 모두가 자신의 일을 다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사회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생태계가 그랬듯, 우리 사회도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고, 모두가 함께 조화를 이룰 때 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보면, 인류를 진보시킨 주역은 바로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주로 위인들의 이름을 만나게 되지만, 그들이 홀로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아무리 비범하고 강력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결코 역사를 바꿀 수 없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칭기즈칸, 나폴레옹이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전투에서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운 수많은 김 아무개, 박 아무개와 같은 이름 없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우리는 식물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한 무명의 존재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때로 익숙함에 속아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부모님의 잔소리, 친구의 농담, 차려진 밥상… 평소에는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진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차리곤 한다. 눈앞에서 그들이 사라졌을 때, 있을 때 더 감사하고 고마워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도 분명히 식물처럼 든든히 제 역할을 다하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존재들이 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풀 한 포기, 나를 지탱해 주는 내 인생의 나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기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굴러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며,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뿌리와도 같은 힘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에머슨의 말을 빌려 마무리하고 싶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무명의 존재들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자, 역사를 만들어가는 숨은 주역들이다. 그들의 작은 노력과 성실함이 모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간다. 그 평범함 속의 위대함을 잊지 말자. 우리의 삶도,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작은 노력으로 더욱 빛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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