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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Sep 13. 2024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진화적 안정화 전략(ESS)

극단을 피하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혜란 언제나 '적절함'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얻기 위해 '중용의 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덕이란 많음과 적음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용기, 즉 중간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의 '중도'도 이와 비슷하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고행과 명상을 통해 깨달은 바른 도리, 치우치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과유불급"이라는 교훈을 주었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뜻으로, 모든 일에는 균형과 적절함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맥락에서 적절함은 인간의 삶과 의사결정에 있어 언제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만이 적절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특히 진화의 과정에서도 극단은 피하고 균형을 찾으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생명체들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수많은 세대를 거쳐 변화하고 적응해왔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최적의 균형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한 특성은 생존을 위협받기 마련이고, 그 중간 어딘가에서 생명은 자신의 길을 찾아나갔다.


이러한 자연의 방식은 마치 우리에게 "중도의 길을 걸어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의 흐름 속에서, 극단을 피해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생명체들의 끊임없는 시도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진화가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와 그 의미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진화와 중도의 관계를 탐구하는 여정은 그저 생물학적 관점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오래도록 찾아온 지혜의 길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펴보는 여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적당함의 산물이다. 생명체의 세계는 항상 변화하고, 그 변화 속에서 극단적인 특성은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우리의 성격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유전자의 상호작용과 환경적 요인의 결과물로 극단적인 성격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시험을 견디기 어렵다. 예를 들어, 겁이 거의 없는 사슴을 상상해 보자. 이 사슴은 나무 뒤에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풀을 뜯어 먹는다. 그러던 중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사자가 갑자기 나타나 사슴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는다. 지나치게 겁 없는 성격은 결국 생존에 취약해지고 이러한 특성을 가진 개체는 후대에 유전자를 전달하기 어렵다.


반대로, 지나치게 겁이 많은 사슴을 생각해 보자. 이 사슴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놀라 도망가기 바쁘다. 결국, 이 사슴은 먹이를 충분히 먹지 못해 영양이 부족해지고 생존과 번식에도 불리해진다. 이렇게 겁이 너무 많거나 너무 없는 개체들은 둘 다 극단에 치우친 특성 때문에 살아남기 어렵다.


그러나, 적당히 경계하면서도 먹이를 찾을 수 있는 사슴 즉 적당히 용감하고 적당히 겁을 지닌 사슴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긴장감과 이완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좋은 음악이 탄생하는 것과 같다. 지나치게 긴장된 음은 불협화음을 만들고, 지나치게 느슨한 음은 음악을 무미건조하게 만든다. 결국, 아름다운 멜로디는 적당한 긴장과 이완의 조화에서 나오는 법이다.


자연은 항상 이렇게 극단을 피하고 중간의 균형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나치게 강한 것과 지나치게 약한 것은 자연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도태된다. 자연은 마치 예리한 눈을 가진 심판처럼 머리와 꼬리를 쳐내고 적당함의 범주에 속하는 것만을 남겨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지금 나에게 전달된 유전자 역시 그 모든 역경을 뚫고 살아남은 적절한 선택의 결과물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지만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 적절함의 범주 안에 속한다. 세상에는 유난히 잘난 사람도 유난히 못난 사람도 없다. 그저 모두 적당한 자리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 보자. 왜 동물들은 동종을 잡아먹지 않을까? 동종은 서식지와 먹이가 겹치는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에는 '적절함의 법칙'이 작용한다. 이를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이라고 부른다.


동물들은 무작정 싸우거나 동종을 잡아먹는 것이 늘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화 과정에서 깨달아 왔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손익을 계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개체가 무조건 싸움을 걸어 상대를 물리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개체는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부상을 입거나 에너지를 소모해 결국 자신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싸움을 피하기만 하는 개체는 생존은 가능하겠지만, 먹이나 짝을 차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매파처럼 공격적인 개체와 비둘기처럼 온순한 개체들이 서로 섞여 있을 때, 이들 간의 싸움이 반복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선택은 서로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도록 유도한다. 공격적인 개체가 너무 많아지면 싸움의 비용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온순한 개체들이 유리해지고, 온순한 개체가 너무 많아지면 공격적인 개체들이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균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즉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우세하지 않을 때까지 이 두 유형이 공존하게 된다.


동종을 무작정 잡아먹기보다는, 서로의 행동에 따라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유전자를 보존하는 데 더 안정적인 전략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ESS는 개체들이 단기적인 이득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보장할 수 있는 최적의 행동을 찾도록 만든다.


그래서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무작정 싸우기보다는, 언제 싸워야 하고 언제 피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마치 자연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쳐 '적절한' 전략을 계산해 온 것처럼 말이다.


유전자가 지나온 영겁의 시간은 유전자를 다듬기에 충분했다.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형질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자연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자연은 마치 예리한 조각가처럼, 생명체의 머리와 꼬리를 쳐내고 중간에 위치한 적절한 것들만을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지금 나에게 전달된 유전자는 그 모든 역경을 뚫고 살아남은 적절한 선택의 결과물들이다. 우리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지만, 자연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모두 적절함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세상에 유난히 잘난 사람도, 유난히 못난 사람도 없다. 그저 모두 적절한 자리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그의 말처럼 인생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어떤 선택은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또 어떤 선택은 우리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때로는 그 선택이 잘못된 길로 인도해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우리 자신이 한 선택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으며, 그 책임을 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는 흔들린다. 진로를 결정하거나, 중요한 관계를 시작하거나, 또는 그만두는 모든 순간이 그러하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자연은 이러한 순간들에 대해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듯하다. 극단의 길이 아닌 적절함을 선택하는 것.


자연은 극단을 피하고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적절한 수준의 유전자가 살아남고, 적절한 특성을 지닌 개체가 환경에 적응한다.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한 특성은 결국 도태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중도의 지혜를 속삭인다. 극단에 치우친 선택은 오래가기 어렵고 적절함만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선택 앞에 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함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움츠러들기보다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현명한 선택이란 결국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 '적당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C(Choice)'는 단순히 무작정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길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적절함을 찾기 위해 선택을 거듭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존재이다.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적절함이란 나침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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