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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책방 Sep 25. 2024

기울어진 운동장

유전학

현대 사회의 불공정함에 대한 민감도는 날로 커지고 있다. 과거 한국인들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헝그리 정신'을 통해 사회적 기적을 이루어냈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은 '앵그리 정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세대와 젠더, 정치적 갈등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현대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반응하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불공정함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불공정함은 단순히 제도적인 결함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연, 지연, 혈연에 따른 인사의 불공정성이나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는 경우에 대한 분노는 단순한 개인의 감정을 넘어서 사회적 증오를 일으키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능력주의는 공정성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능력주의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다'는 원칙을 통해 공정함을 주장하지만, 마이크 센델 교수는 이를 비판한다. 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센델 교수는 능력주의의 공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모든 이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능력주의적 약속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며, 그 이유로 '유전자의 차이'를 지적한다.


유전자는 단순히 외모를 결정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지능과 건강을 포함한 여러 요소들은 유전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는 곧 출발선 자체의 불공정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유전적인 요소가 개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사실은 능력주의의 공정성을 재검토하게 만들며, 제도가 아무리 공정성을 추구하더라도 근본적인 출발선에서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의 불공정함은 단순히 제도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와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복잡한 문제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전자는 생명체의 설계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설계도는 생명체의 모든 구조와 기능을 결정짓는 정보를 담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에 따라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처럼, 유전자에 따라 단백질이 단계적으로 합성된다. 만약 유전자를 정확히 복제하여 발현시킨다면,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다. 세균의 경우, 부모와 자식이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기 때문에 동일한 생물학적 특성을 지닌다.


유전자는 세포 내의 핵에 존재한다. 세포의 중심에는 핵이 있으며, 이 핵 안에는 유전물질인 DNA가 포함되어 있다. DNA는 네 가지 염기 서열 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C(사이토신)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이중 나선 구조를 형성한다. 아데닌(A)은 티민(T)과, 구아닌(G)은 사이토신(C)과 결합하여 DNA의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한다. 염기 서열의 배열에 따라 유전자가 달라지며, 이는 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DNA 내에서 특정 형질을 결정하는 일부분을 유전자라고 하며, 하나의 DNA에는 여러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두 가닥의 DNA는 발현될 때 한 가닥의 RNA로 '전사'된다. 전사된 RNA의 염기서열을 바탕으로 단백질을 만드는 데 이 과정을 '번역'이라고 한다. 유전자 언어로 적혀있는 유전정보를 단백질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은 근육이 되고, 눈이 되고, 손이 되고, 효소가 된다. 정리하면 DNA에서 RNA로 전사되고, 전사된 RNA를 바탕으로 단백질을 만든다. '전사와 번역'이 두 과정을 '중심원리'라고 부르며 생명체라면 무조건 갖고 있는 핵심적인 생명 기작이다. 우리의 몸은 이렇게 빚어진다. 설계도를 보면 그 건물의 구조부터 인테리어까지 모두 알 수 있듯, 유전자를 보면 그 사람의 외형과 내형을 모두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포는 생식세포이다. 자식에게 전달될 유전자가 바로 이 세포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체세포는 온전히 개인의 것이지만, 생식세포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된다.


생식세포는 부모의 유전자의 절반만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배우자의 몫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서로의 반쪽을 채워주어 완전한 유전자 쌍을 이룬다. 유성생식을 하는 모든 생물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식을 낳는다. 배우자를 '내 반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식세포가 생성되는 과정에서는 유전자가 무작위로 절반만 선택되어 남는다. 물론 이 과정에도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따르더라도 유전자의 절반을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따라서 생식세포는 모두 고유한 유전 정보를 지닌다.


정상적인 남성은 한 번 사정할 때 약 1억 개의 정자를 방출하며, 이 정자들은 모두 서로 다른 유전 정보를 운반한다. 유전자의 무작위적 분배는 생물의 다양성을 높인다. 같은 가족이라 하더라도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유전적 원리에 기인한다.


죽음이 오면 내 몸은 흙으로, 엄밀히 말하면 원자로 돌아간다. 그러나 내 유전자는 자식과 후대에게 계속해서 전달된다. 몸은 사라지더라도 유전자는 여전히 누군가의 몸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를 거듭할수록 유전자는 희석되겠지만, 그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를 '불멸의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는 생물을 '유전자를 위한 기계'라고도 불렀다. 우리가 유전자를 지닌 것인지, 유전자가 우리의 탈을 쓴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대한민국은 현재 저출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출산을 독려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출산지원금, 교통비 지원, 양육비 지원 등 다양한 복지 정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젊은 세대는 여전히 자녀를 낳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가짐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이 유전자에서 비롯된 현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존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고 느껴질 때, 새들은 알의 개수를 줄인다. 이는 현재의 환경이 자식을 많이 낳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여러 마리의 자식을 낳고 기르려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는다 해도 일부는 굶어 죽을 가능성이 있고 이는 유전자 전달 과정에서 큰 에너지 손실로 이어진다.


따라서 확실히 잘 기를 수 있는 만큼만 낳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는 것을 진화의 과정에서 터득한 것이다. 현재 신혼부부들이 자녀 출산을 꺼리는 것도 이러한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자식을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이 모두 유전자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마치 우리가 유전자가 부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듯한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은 인간이 유전자의 꼭두각시인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다.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우리가 노출되는 환경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유전정보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에 차이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으면, 그 유전자가 가진 형질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그 발현 여부도 중요한 요소이다. 후성유전학은 이러한 유전자 발현의 차이를 근거로 유전자 결정론을 부정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왕개미와 일개미의 사례를 살펴보자. 여왕개미와 일개미는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들이다. 그러나 태어난 후 처한 환경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로열젤리를 섭취한 개미는 여왕개미가 되고, 그렇지 않은 개미는 일개미가 된다. 이 경우 먹이가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하여,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환경에 따라 개미의 생김새, 성질, 나아가 역할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발견은 유전자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이다. 후천적인 요소가 유전적 영향에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재능이나 성격에 있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논쟁이 많지만, 기존의 유전학이 선천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후성유전학은 후천적 요인의 중요성을 지지해 준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가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망을 주는 듯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세상이 얼마나 불공정한지를 또 다른 시각으로 보여준다.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스트레스, 영양 상태, 그리고 생활환경은 우리의 건강, 행동, 심리 상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는 사회적 불균형이 생물학적 불균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생각하면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 사회는 흔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려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쉽게 던진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은 이러한 단순한 판단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환경은 개인의 노력 이상으로 삶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이 말했듯 우리는 공정함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성공을 이룬 사람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그 결과를 얻었다고 믿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일 수 있다. 우리의 성공은 단지 우리의 노력뿐만 아니라 운 좋게 주어진 유전자와 환경에 기인할 수도 있다. 이것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나의 성취가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면 이제는 그 성취를 사회와 나누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샌델은 능력주의를 대해 비판하며 성공한 이들이 자신의 성공을 당연시하며 사회적 책임을 잊고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후성유전학은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가 더 큰 공감과 인류애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생물학적 불공정이 사회적 불공정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단순히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리처드 도킨슨은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이런 말을 적었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유전자의 폭력에 항거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이 개체 간의 불평등을 촉발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아는 것에 그쳐선 안된다.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세상은 불공정하게 짜여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공감'과 '나눔'이다. 공감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각자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게 해 준다. 나눔은 그 공감을 행동으로 옮겨 사회적 불평등을 줄여 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공감하고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불공정한 세상을 보다 공정하게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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