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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Oct 30. 2022

손때 묻은 것들

과학과 에세이

아날로그에 아직 익숙하다. 아이패드가 있고,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두어 대 있어도 그렇다. 중요한 건 웬만해선 손으로 한다. 중요한 사람에겐 짧아도 손으로 편지를 쓰고, 중요한 기억은 타이핑 대신 다이어리에 손으로 남긴다. 디자인 툴을 끄고 손으로 그려낸다. 요즘은 전자 결재에 전자 문서에 익숙해져야 한다는데, 디지털로 그려내고 매무새도 화려하게 매만져야 능력이라 하는데도,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이 편하다. MZ세대라지만 손으로 하는 일들이 좋다.


손에는 많은 흔적이 남는다. 흔적이 많다는 건, 그만큼 손에 익은 것들이고. 손이 닿을수록 지문이 남으면서 그때의 촉감이 저장된다. 당시의 질감이 기억된다. 그래서 하나둘, 오래되거나 안 쓸 걸 알아도 버리지 못하는 존재가 생겨난다. 이사 철이 되어도 한동안의 고민 끝에 상자에 다시 담아두곤 하는 존재들. 손이 남긴 흔적들이 아까워, 손이 묻힌 세월들이 소중해 보관하게 되는 그런 것들. 손은 그렇게 흔적을 남긴다.


옷장이 가득해도 자꾸만 꺼내는 옷이 있다. 신발장이 꽉 차도 늘상 내신는 신발이 있다. 여러 개 걸려있음에도 이내 선택이 중복되는 가방이 있다. 물건들에도 기억이 있다. 자주 입는 옷, 매번 신는 신발, 항상 드는 가방. 손이 간다고 표현한다. 손이 가게 되는 건, 함께 한 흔적을 공유하는 일이고. 기억은 뇌가 독박하는 일만은 아니다.


내게 가장 잘 맞고 나와 잘 어울리고 나를 잘 살려주는 걸 아니까 손자국이 남은 그것들에 자꾸만 손이 간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존재지만, 그러니 소중한가 보다. 손때 묻은 것들에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다. 손으로 하는 일이 좋은 이유이고. 손이 남긴 기억과 흔적의 값어치를 알기에, 디지털 시대에도 서툴지만 자꾸만 손으로 하게 되곤 한다. 손으로 짜준 목도리가 비뚤배뚤하다 해도 그런 비뚤함을 누가 싫어할까. 오랫동안 쓰고 매만져서 길이 든 흔적, 손때 묻은 것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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