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산길을 걸었다. 늘 다니는 길인데 발에 차이고 밟히는 것이 나타났다. 맘껏 익어 ‘툭툭’ 떨어져 굴러다니는 도토리다. 귀여운 이름만큼이나 올망졸망한 모습을 보면 철없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첫 장면은 10대 초반 나이에 가장 재밌었던 불장난이다. 친구들과 불을 지피고 둘러앉으면 그냥 즐거웠다. 오늘날 ‘불멍’의 전설이다.
불장난은 도토리를 불 속으로 던지면서 절정에 달한다. 열받은 도토리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사방으로 튄다. 어둠이 내리면 화려한 불 쇼를 연출했다. 불똥이 머리에 맞는 아찔한 상황이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두 번째 장면은 경쟁이다. 고만고만한 것을 가지고 친구와 다투는 모습에 어른들은 '도토리 키재기' 한다고 혀를 차며 놀렸다. 도토리와 비교되어도 아이 마음은 뭐든지 앞서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도토리는 지금도 가을 산길에 수북하다. 불장난은 사라졌지만 ‘도토리 키재기’에 얽힌 이야기는 아직도 흥미롭다. ‘비슷비슷한 건 비교의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 내포된 이 말은 여러 종류의 도토리가 있었기에 생겨난 속담이다.
도토리가 열매 맺는 나무가 참나무다. 산림 수종의 약 1/4이 될 정도로 매우 많다. 이때 참나무는 한 종을 나타낸 게 아니라 사실은 ‘참나뭇과’다. 여기서 ‘과(科)’는 분류 용어로 원어로는 ‘Family’이며 상호 연관성이 높은 집단을 말한다.
참나뭇과는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이 있다. 도토리의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른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종이 상수리나무다. 왕의 수라상에 묵으로 올랐다는 상수리는 마을 주변이나 산기슭에 특히 많다. 숲속에서 만나는 다른 참나무들과 달리 경쟁 회피라는 속성을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참나무 중 가장 곧고 크게 자라며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둥글고 큰 도토리가 달린다. 옛날 아이들의 구슬 놀이용이고, 수액이 넘쳐나 사슴벌레 같은 곤충의 서식 장소였다.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고 재질이 단단해 땔감이나 각종 도구로 사용했다. 보릿고개를 견뎌낸 구황작물로도 한몫했는데 졸참나무 도토리로 만든 묵이 최고지만 채취가 수월한 상수리나무 묵이 가장 많았다.
현대인에게 도토리는 활용도가 낮아 추억으로 남았다. 이제는 ‘도토리 키재기’라는 비유조차도 인용할 기회가 별로 없다. ‘도긴개긴’이나 ‘오십보백보’라는 유사어가 더 많이 쓰인다.
환경 변화로 상수리나무를 민가 주변에서 보기도 쉽지 않지만 가끔은 산행길에서 홀로 있는 나무를 만난다. 안정되고 커다란 수형에 매료되어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진다. 매달리고 오르고 싶은 모험심이 지금도 남아 있고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는 잠재되어 있던 불장난의 충동을 자극한다.
상수리나무는 낙엽 활엽 교목으로 양지에서 30m 정도까지 자란다. 참나무의 이름 참[眞]은 ‘좋음’ ‘충실’ 등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소나무의 송화가루가 봄에 많이 날리지만 참나무 꽃가루가 오히려 알레르기를 가장 많이 일으킨다.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이 다람쥐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돼지가 더 좋아한다. 그래서 ‘도토리’의 어원도 돼지의 옛말인 ‘돝’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