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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Mar 04. 2021

한양도성 순성길-2

안산에서 흥인지문까지(북쪽으로)

한양도성을 절반을 나누어 걷는다. 안산을 빼어놓고 가기에 아쉬움이 있어 안산을 둘러보고 걷기로 하였다. 안산은 지금 핫하다. 안산에 둘레길이 너무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걸어본다. 평일에는 주부들도 이곳에 들려서 산을 즐긴다. 안산을 즐긴다. 안산에는 봉화대도 있고 안산에 데크가 형성이 되어 있어 이를 즐길 수 있다. 안산은 무악재를 기점으로 한쪽은 인왕산, 한쪽은 안산인 것이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불러왔다고 한다.

인조 때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이며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인천으로 들어온 유엔군이 최후의 전쟁을 벌였던 곳이라 한다.


산아래에는 우리 독립투사를 가두고 고문을 하였던 서대문형무소가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변신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다. 곳곳에 우리 선조들이 일제에 의하여 형무소에서 고난을 받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어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안산과 인왕산은 현재 구름다리로 연결이 되어 있지만, 서대문 독립공원을 지나칠 수 없어 안산을 내려와서 서대문 독립공원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감옥의 대부분 옥문을 닫아놓았지만 열어 놓은 곳도 있다. 유관순 지하감옥은 막아 놓았는데 유리로 이를 내부를 볼 수 있다. 독립문보다. 3.1 운동 기념탑이 나의 눈에 더 띄었다. 서대문 독립공원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이것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독립문이 있다.

인왕산을 올라간다. 한양도성을 걸으려면 인왕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예전에 중종반정 때 치마 바위가 유명하다.  중종이 왕이 되기 전 부인이었던 단경왕후가 폐위된 후 중종을 그리워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왕산 정상의 넓은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우선 인왕사를 거쳐 선바위를 지나 성곽으로 간다. 국사당 위쪽에 있는 바위는 고깔 쓰고 장삼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의 바위로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하였다. 선바위에 불자들이 불공을 드리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길이 이렇게 힘들다면 안산에서 서대문 독립공원을 거치지 않고 인왕산을 갈 것인데 휴회를 한다. 선바위에서 올라오는 길과 안산에서 올라오는 길에서 그냥 내려다보면서 후회를 할 뿐이다. 멀리 안산이 보이고 이웃한 바위가 화강암 지대에 현무암이 있다. 돌출변수는 항상 무엇인가 궁금증을 자아내고 사람들에게 흥미를 끈다. 현무암과 같은 바위에 하얀 글씨가 이채롭다. 현무암은 아니다. 멀리서 보면 모자바위다.

해발 338m인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성벽을 끼고 걸으면 험난하다고 할 수 있다. 성곽은 항상 능선을 끼고 걷다 보면 가파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암벽이 성벽이 되어 있는 곳이 많다. 무악재 방향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그곳을 곡성이라고 한다. 이곳은 군사시설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인왕산 정상에 도착하면 뾰족한 매부리 바위가 있으며 삿갓모양의 삿갓바위가 이다. 이곳이 인왕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이제 하산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Bluehouse를 향하여 카메라가 움직이면 누군가가 왔었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다. 세월이 많이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왕산을 24시간 개방도 한다.


인왕산을 내려오면서 기차바위가 있다. 재미있게 이정표를 해놓았다. 이정표 이름이 TrainBawi라고 되어 있다. 이정표를 기록할 때 그래도 생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창의문에 도착하기 전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했다고 한다. 종로구에서 이곳에 윤동주 언덕이라고 명명하고 윤동주 문학관도 만들어 두었다. 이곳에 시비가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의 인연에 의하여 스토리텔링을 만든다. 이곳에서 하숙을 하였다고 하여서 윤동주와 관련된 다양한 시설을 만든 것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청운아파트 수도 가압장이었으나 청운아파트를 철거한 후 필요가 없어진 후 문학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전시실이 약간은 특이하게 생겼다. 물탱크였던 시설에서 영상을 촬영하고 전시실을 만들어 운영한다. 사면이 시멘트이고 들어오는 입구도 특이하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하였고 현재는 현충시설로 지정받아 관리되고 있다.


순성길을 걷다가 인왕산을 내려와 피곤한 몸을 윤동주 시인을 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도 괜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의 삶이 일본에 의하여 죽음도 엿볼 수 있다. 일본 교토에 있는 윤동주 기념비에 한국인을 포함하여 일본인들도 참배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아픈 역사가 있을 때 그 시가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이 출간된 것을 들어보면 더 드라마틱하고 연희전문 시절의 하숙과 윤동주가 연결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은 생존 당시 발행되지 못하고 연희전문 시절 친구인 정병욱이 보관하였다가 광복 후 1948년 발행되었다. 일제의 사전검열에 의하여 발행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일본에서 친구이자 후배인 정병욱에게 보냈으며, 정병욱은 이를 마루 밑 항아리에 숨겨 보관하였 던 것이 그의 사후 그 친구가 이를 발간한 것이다. 우리는 그 친구의 노력으로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윤동주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작성하신 참회록을 한번 적어 본다.


참회록(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창의문이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으며,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고 한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라고 한다.


창의문을 올라가기 전 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 동상이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였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인왕산이,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 2007년에 백악이 각각 다시 개방되었으며 이제는 신분증명 없이 패찰만을 갖고 이곳에서 숙정문까지 이동을 한다. 힘겹게 계단을 오른다.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북악산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곳에 정상석이 있다. 백악산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북악산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소나무에 총알이 스친 흔적이 있다. 1.21 때 북한에서 내려온 김신조 일당과 이곳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그 흔적이라고 한다. 1.21 흔적은 곳곳에 있다. 숙정문을 지나 북한산을 가는 길목에는 총알 바위가 있다. 창의문을 올라오기 전에 순직한 경찰의 동상도 있다.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북쪽에서 보낸 사람들이 남쪽의 정상을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즈음 같으면 전쟁이 났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남쪽의 군사력이 미약하였고 북쪽에 대하여 응징하지 못하였고 응징을 위하여 남쪽에서도 준비하였지만 실미도라는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1.21 이후 폐쇄된 곳이 많이 있고 30년 동안 보존되어 우리에게 그것이 허파 역할을 한다. 아이러니하다.

성을 안을 걸었다. 밖을 걸었다. 다시 안쪽을 걷는다.

성을 걸으면서 보호되었다는 것에 감사를 한다. 1.21로 북에서 공격을 하지 않았으면 보호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리 권위주의 정부, 무소불위 정부가 있었어도 훼손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보호하고 복구할 수 있지만, 개발의 시대에서 보호가 주목적이 아니고 개발이 주목적이었다. 그 결과 후손들은 잘 관리된 성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군부대가 훼손을 하였지만 그렇게 많이 훼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고 한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한양도성의 4대 문 중에 하나가 이 숙정문이다.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 안내소에서 패찰을 반납하고 이제 또 걷는다. 삼청공원으로 가는 길과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이 분리된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와룡공원으로 가야 한다. 말바위 전망대에서 멀리 본다. 서울시내도 보고 지금까지 온 길도 돌아본다. 단풍을 볼 수 있으면 성북동의 다양한 모습도 본다.


가을날 와룡공원은 단풍이 멋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서울국제고등학교, 서울과학고등학교, 경신 중고등학교 등 학교의 연속이다. 성안은 학교, 성 밖은 주택가이다. 맛집들이 있다. 이곳에 맛집이란 것인 왕돈가스가 주류다.

경신고등학교 뒷길에서 혜화문까지 이어지는 골목길. 성벽이 심하게 훼손되어 군데군데 흔적만 남은 길이다. 경신고등학교 뒷길 초입에서는 성벽이 학교 담장으로 쓰인다. 경신중 · 고등학교를 지나면 ‘ㄱ자’ 모양으로 꺾인 주택 담장 아래에서 축대로 사용된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혜성교회 계단 길 양쪽에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한양도성의 흔적은 100m 정도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가 두산빌라 건물 앞에서 다시 나타난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일제에 의하여 형성된 도로가 그대로다. 궁궐 앞으로 종묘와 분리되도록 한 것이다. 서울시가 이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나 쉽지 않다고 하였다.

혜화문을 지나서 이제 낙산으로 간다. 이곳에서 보는 낙조가 멋있다고 한다. 낙산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다닌다. 낙산 정상에까지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화동 벽화마을이 있다. 이화동은 조선 시대 쌍계동(雙溪洞)이라 불렸으며,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도성 내 5대 명소 중 한 곳으로 꼽혔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택단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 이화장 일대의 불량주택 개선을 목적으로 주택단지를 조성하였지만, 노후된 채로 방치되어 마을이 빈민가로 변화가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서울시 등에서 마을 재생사업을 사업을 시작하였고 여기에 예술가들이 동참하여 이화 벽화마을은 각종 영화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등장하였다.  우리들은 TV 등에 나오면 가본다. 그 결과 관광객들이 급증하였지만,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이 강구되고 있다.


성벽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흥인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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