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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Feb 23. 2021

한양도성 순성길- 1

독립문에서 흥인지문까지(남산을 지나)

한양 내성을 걸어본다. 한양도성은 조선 500년의 역사를 함께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헐리어 지금은 사대문인 숭례문,  흥인지문이 그대로 남아있고 인왕산과 백악산을 휘둘러 숙정문을 거쳐 낙산 주변에는 성벽 위에 주택이 들어서 있다.


오늘은 남쪽으로 걸어 본다. 독립문에서 시작하여 숭례문을 거쳐 목멱산(남산)을 올라 봉수대를 확인하고 성벽을 따라 장충단을 거쳐 흥인지문까지 걷는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성의 흔적은 사라졌다. 옛날 고려의 유신들이 개성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찾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지금 이곳은 당시의 모습은 다 사라졌다. ‘산천은 변함없데 인걸은 간데 없네’ 읊던 선조의 읊조림과는 다르다.


서울시에서 친절하게 옛성길과 지금의 변화를 친절하게 설명해 놓아 이를 활용해본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네 생활일 것이다. 하지만, 도성길을 걸으면서 주변을 지나치는 것이 예의가 아니어서 둘러본다. 독립문역에서 출발하니 독립문을 지나칠 수 없다. 예전 중국 사신들이 오면 이곳 영은문까지 와서 영접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립이란 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지금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이를 기념하기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가 중국 등 외세의 간섭을 회피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너희들은 이제 독립국이니 이를 알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 없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고 1905년 외교권을 침탈하고 1910년 국권을 뺏어갔다.

그리고 현판에 대하여 요즈음 누구 글씨야에 논란이 있다. 이완용의 글씨다. 아니다. 하고 있다. 역사인데 그것도 문제다.

아울러, 저 문이 우리에게 중국의 동북공정을 자꾸 떠오르게 한다.

성곽으로 오르면서 인왕사를 거친다. 인왕산의 인왕사이다. 호랑이 탱화가 이채롭다. 탱화를 그려났는데 이제 그 그림들이 색채가 바라고 하늘로 기운을 뻗치고 있다.

선바위를 지나는데 수탉이 우람차다. 그놈 차 토실하다. 절에서 저 닭들의 삶은 영원할 것이다. 살생을 멀리하는 사찰에 닭이 자라는 것도 신기하고 그 신기한 것이 저렇게 토실하다. 선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지만 제단이 있고 불자들이 불공을 드리고 있다. 불자인 무학대사와 유학자인 정도전의 논쟁이 있지만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유학자인 정도전이었고 그 결과가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한양도성을 걸으면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남산을 바라본다. 인왕산은 돌산이다. 남산은 정상에 피뢰침을 머리에 장식하고 있다. 예전에는 남산의 봉수대를 쳐다보지만 요즈음은 남산 위의 저 타워를 본다. 인왕산 옆의 안산에는 봉수대가 있다. 남산 즉, 목멱산이 잘 보이기에 북쪽에서 내려온 봉수대의 마지막 전달지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성곽으로 간다. 사직단이 있다. 나는 이것이 독립문보다. 더 정확하게 중국의 식민지 또는 속국이 아니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중국 사신들이 들어오는 입구에 사직단을 설치하여 여보란 듯이 보여준 것이다.


사직은 왕이 다스리는 땅을 주관하는 신을 모신 사당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 중에서는 사직이 더 우위였으며, 어떠한 사정이 생겨 종묘에서 지낼 제사를 생략하더라도 사직에는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오더라도 큰 나라와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지만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는 독립국이란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사직터널을 지나자마자 홍난파 선생이 거주하였던 주택이 있어 가본다. 고향의 봄, 퐁당퐁당 등의 작곡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친일행적으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옛 저택 앞에 있는 흉상도 원래는 kbs방송국에 있었으나 친일 논란으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친일의 굴레를 벗어나기도 전 1941년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는데 강압에 의하여 친일 작곡을 한 것인지 여부는 필요 없다. 친일이라는 것으로 낙인찍히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분법적 사고가 차고 넘친다.

이분법적 사고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속된 것이다. 좋은 놈과 나쁜 놈, 그리고 착한 놈과 미운 놈, 내편이 아니면 상대편이 되는 것이다.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정서다. 중간을 좀 허용하였으면 좋겠다.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편이 되어 보는 것은 중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갈등을 지속되며 확산될 뿐이다.


그의 작품으로 작품에는 《봉선화》 외에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 도쿄 유학 직전에 남긴 《통속창가집》 《행진곡집》 등 17권의 편저작물이 있다. 이밖에 저서에는 《음악만필(音樂漫筆)》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서 딜쿠샤(테일러 가옥)을 찾아본다. 1000만 영화였던 택시의 독일인 기자와 유사하게 딜쿠샤에는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UPI 서울특파원을 겸하면서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딜쿠샤는 현재 보수 공사 중이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복원된 한양도성이 너무 낯설다. 차라리 옛돌들 모양으로 복원을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순조시절 복구 시 네모난 돌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그 모양이 훨씬 나아 보인다.

이제 경교장이다. 김구 선생이 거주하였고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되신 곳이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구내에 있다. 삼성재단이 이를 인수하였고 이를 보호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경교장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그 모습이 남아 있지 못했다고 한다. 친일파의 가옥을 본인의 별장으로 사용하던 것을 귀국한 김구 선생에게 제공하였고 김구 선생 사망 후 반환되었다가 중국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전쟁 중에는 미군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우여곡절을 격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자기의 정적에 대한 예우를 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7년 삼성재단이 매입해 현재 강북삼성병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2층의 백범 집무실은 2005년 기념실로 단장된 바 있다. 한편, 경교장은 3년여의 복원 공사를 거쳐 2013년 3월 일반에 공개됐다.

이제 경희궁이다. 일명 서궁으로서 아픔의 역사를 그대로 같고 있다. 일제가 이곳을 헐고 학교를 세웠다. 지금은 학교를 옮기고 경희궁을 복원하였지만 어느 사대부 집 정도로 복원되었다.


서울의 4대 문은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이다. 그중 돈의문은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경희궁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돈의문 근처에는 근대역사를 볼 수 있는 거리가 있다. 예전에는 재개발하려고 하였으나 재개발하지 않고 박물관 마을을 만들었다. 마을 안내에 따르면 "돈의문 박물관마을은 이웃한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더불어 2003년 ‘돈의문 뉴타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존 건물의 전면 철거 후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었으며, 서울시는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동네를 전면 철거 후 공원으로 만드는 게 원래 계획이었지만,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게 아니라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을 선택하여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 재탄생하였으며 돈의문 지역의 역사와 재생을 소개하는 돈의문 전시관,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한 한옥시설,

6080세대의 추억이 살아 있는 아날로그 감성공간 등 100년의 시간이 중첩된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마을로 재탄생되고, 2015년 마을의 원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예전에 이곳에 재개발 반대와 재개발 찬성 현수막이 즐비하였는데, 어느 것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정동길로 들어선다.


아관파천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 자리를 가본다. 일부분이 그대로 둔 상태이다. 이곳에 그 흔적을 남겨 둔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보수 작업을 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건물 옆으로 난 고종의 길을 걸어본다. 고종의 길을 걷다 보면 끝에 미국 대사관 관저가 있다.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나온 길이다.

아직도 이 근처에는 외국공관이 많이 있다.

정동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화학당이 있었고 정동 제일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정동극장이 있다. 이화학당이 이곳에 있고 배화학당은 인왕산을 내려오면서 시작단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화여고를 찾는 사람들이 이대 근처에 가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이대부속고등학교이다.


정동극장은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1908년에 문을 열었던 원각사()의 복원을 이념으로 하고 있다. 개관 당시에는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독립법인이라고 한다.


이곳에 신아일보와 관련된 건물이 두 곳이나 있다. 본관과 별관이다.


배재학당도 근처에 있었으나 여학교는 그대로 있는데 남학교는 이제 이곳에 없다. 도심학교 이전계획에 따라 이전하여 그 위치만 남아 있다. 덕수궁을 끼고 정동길은 예술이 넘치고 사람이 넘쳐 차 없는 거리로 운영이 된다.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고종 황재가 하사한 이름으로, 영재를 배양한다는 배양 영재의 줄임말이다

이곳에 아펜젤러 기념관이 있고, 배재학당에 대한 기념석이 있다.

이제 숭례문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조각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애국지사가 의병가를 등사하는 모습이다. 예전 70년대까지 우리 시대에 저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그리고 그 모습이 가장 쉽게 유인물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었다. 독립항쟁을 하면서 여성 투사들의 노력을 이런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숭례문을 가기 전 서울 상공회의소 담장에 옛 성의 흔적이 있다. 그래도 공공건물인 만큼 이를 남겨두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숭례문이다. 저 수문장이 그대로 서 있다. 뒤에 어린 친구들이 논쟁 중이다

"조각상이야"

"아니야 사람이 그대로 서 있는 거야"


친구가 살짝 가본다. 움직인다

"사람이 그대로 서 있었네"


 꼼짝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숭례문은 국보다. 그리고 상징성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근처에 와보고 싶어 한다. 2008년 초 어떤 사람이 저곳에 올라가서 불을 붙였다. 그래서 다 소실이 되었다가 복원이 된 것이다. 이제는 지키고 있다. 아무도 올라가지 못하게 그리고 확인을 한다.


남산으로 간다. 성곽과 도서관 그리고 n타워가 포토존을 형성하고 있다. 어릴 적 저 도서관이 상징이었다. 교과서에 저 도서관이 상징적으로 보이면 멋있고 서울이 어떤 곳인지 가보고 싶었다고 할 수 있다.

백범광장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도서관 주변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남산을 온 증거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범 동상은 곳곳에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조금 전 경고장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각종 어록이 있는 광장에서 남산을 바라본다.

이곳에 아픔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곳에 일제는 신궁을 지었고 이곳에 조선사람들에게 참배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인물들의 동상이 즐비한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이상재 선생, 안중근 의사 동상 등이다.

남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예전에 봉화대와 N타워가 있었지만 이제는 연인들의 사랑의 맹세가 있다. 저기에 와서 사랑의 맹세를 하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저 자물쇠를 돈으로 환산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커플들 중에 결혼을 한 커플도 있을 것이고 사랑의 맹세를 하였지만 깨어진 커플도 있을 것이다. 깨어지고 난 다음 저 자물쇠를 열어서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화대이다. 동서남북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보고 한양 사람들은 그날의 국경에서부터의 안위를 인식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높은 산꼭대기에 봉수대(불을 피울 수 있는 굴뚝)를 설치하고 변방에서 일어난 군사상 위급한 일을 서울로 연락하는 군사 통신 제도. 지방의 연락 내용은 서울 남산 위의 봉수대로 전달되었다. 육지의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재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 거, 국경을 침범하면 4 거,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 거씩 올리도록 하고, 낮에는 연기로써 대신하게 하였다.


예전에 어떠한 분이 이러한 봉수대를 역사문화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 지자체, 문화재청이 합동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한번 올려서 서울까지 전달되는 과정을 경험해보자고 이야기 한 기억이 있다. 아침나절에 시작하여 점심이 되기 전에 한양에 신호가 도착하니 옛날에 상당히 빠른 전달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의 중심점이다. 예전에 이런 것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이런 것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그 지점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진을 담아 보았다. 서울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광화문 네거리가 아니라 남산 정상 인근이라고 서울시는 "최근 측량을 통해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남산 정상부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으며, 이 곳에 상징물을 설치하였다"라고 한다(2010년, 연합뉴스). 첨단 GPS 수신기능을 갖춰 실제 측량 기준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산을 내려가는데 성곽이 보존이 잘되어 있고 이것은 어느 시기에 보수를 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성벽을 쌓는 기술이 달랐으며 공사 실명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조가 축성할 때, 세종이 축성할 때, 숙종이 축성할 때, 순조가 축성할 때 등으로 구분되어 설명되어 있다. 세종 때 축성한 곳이 무너져 순조 때 보완 공사를 한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을 한다. 그리고 성위는 현대에 보수를 하였다고 추측을 하였다.하지만, 이곳 성벽은 태조때 축성한 것이 보존이 잘되었다고 한다. 세종이 축성한 것은 신라호텔 인근이라고 한다.

국립극장 근처에서 아래로 둘레길이 있고 중간으로 자동차 길이며 오른쪽으로 산책길이다. 그리고 순성길이다. 국립극장을 지나서 만나는 첫 번째 반얀트리 클럽에서 순성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유지를 열어 준 것에 감사를 할 뿐이다.

이제 신라호텔 뒤편이다. 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산소를 공급하고 있다. 성 안쪽과 바깥쪽을 서로 걸으면서 보니 바깥쪽보다는 성 안쪽 길이 훨씬 걷기도 좋다. 다만, 성벽을 감상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신라호텔 경내에 조각품이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호텔에서 이를 보기 위하여 내방객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양도성을 걸으면서 이를 감상할 수도 있다. 멀리 화살을 날려 보내는 조각은 생동감이 넘친다.

광희문으로 가는 길은 슬쩍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신라호텔을 내려오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우리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가 알바를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광희문으로 걸으면서 저택들을 감상한다. 뒤에는 옛날 성벽이고 앞에는 집을 방어하는 성벽이다.

광희문이다.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 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광희문을 지나서 횡단보도를 가로로 세로로 건너냐 하는데 대장간 앞을 지나면 알바를 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있는 대장간에 홀리어 지나가다가 5분 정도 알바를 했다. 가다가 보니 이정표가 없어졌다. 다시 돌아와서 동대문 DDP로 간다. 옛날에는 이곳에 야구장, 축구장이 있었는데 한양도성을 복원하면서 이를 철거하고 DDP를 만들었다.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다.

축구장, 야구장을 철거한 곳에 옛 성을 복원하였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이 부근은 서울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서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성벽이 청계천을 만나는 위치에는 수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관중석 밑에 매몰되어 있다가 발굴된 이간수문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동대문 역사공원은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조선 후기 이곳에는 훈련도감의 별영인 하도감과 화약 제조 관서인 염초청이 있었다. 1925년 일제는 일본 왕세자 결혼 기념으로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지었는데, 성벽을 이용하여 관중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였던 이 운동장이 헐린 것은 2007년이다. 이를 철거하고 고척돔을 건설하였다. 당시 철거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의 일부와 이간수문(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 치성(雉城 ·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 하도감으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 등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오간수문이 청계천에 있다고 하여서 찾아가 보았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건물 아래로 지나가기에 지속적인 흔들림이 있어 이를 보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여 옹성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도 옹성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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