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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만 Oct 03. 2024

곡성의 진산 동악산 그리고 정취를 보다.

곡성에서 꽃무릇길로 환영받고 노을로 배웅받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탐구를 한다.

경험으로 그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검색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의 지식을 늘려간다.

곡성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2016년에 제작되어 개봉된 영화이다. 그 영화가 그곳에서 제작되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 고장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곡성 하면 기차마을이 생각이 난다.

곡성에 들어서기 위하여서는 국도 17호선을 벗어나서 곡성으로 들어선다. 들어서면서 이런 곳이 있었어하면서 돌아본다. 들어서는 입구는 메타세과이어가 반겨준다. 그리고 그 옆에 요즈음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꽃무릇이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이런 곳을 찾았다는 것이 그저 즐거울 뿐이다. 이곳에 있는 동악산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곡성을 들어가면서 그 길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꽃무릇 상사화의 밭을 그대로 보았다는 것이 좋다. 오늘 오후 돌아갈 때 비예보가 있어 길옆에 자동차를 세우고 메타세쿼이어길과 꽃무릇을 가득 담는다. 그 길을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은 그저 의미 없이 가는 것만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즐겁다.

길을 지나면 이제는 기차마을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드라마 <경성 스캔들> 등의 촬영장으로 쓰였다. 1999년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철도가 옮겨 가자, 새 곡성역에 자리를 내주고 폐역이 됐다. 곡성군은 구 곡성역사 일대를 사들여 섬진강기차마을로 아기자기하게 꾸몄다고 한다. 우리는 기차마을이 주가 아니었지만 기차마을을 알리는 표지기를 보면서 이곳의 풍경을 한 번씩 둘러본다. 자동차는 외곽을 지나갈 뿐이다.


660년 원효대사가 사불산 화엄사에서 이주하여지었다는 도림사로 들어가는 길로 우회전하면서 우리는 국민관광지라는 곳을 들어선다. 좌우에 오토캠핑장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대형차량 주차장이 있고 그 위에 소형차량 주차장이 있다. 더 위로도 올라갈 수 있지만, 산행을 시작하는 부분이 이곳에 있기에 이곳에 주차를 한다. 산행 들머리는 대형주차장 이웃에 있다. 산을 들어서는 들머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데크가 있고 그곳을 통해 산으로 들어선다. 인터넷으로 찾고 그것을 공부하고 이곳에 왔는데 이곳이 맞는지 궁금해하면서 확인을 하는 것이다.  


동악산은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동쪽의 큰 산인 東岳山(동악산)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아니었다. 동악산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다. 신라 무열왕 때 원효가 길상암과 도림사를 세울 때 하늘의 풍악에 산이 춤췄다고 동악산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정표에 설명이 되어있다. 그리고 한자로 動樂山(동악산)이다. 재미는 있다. 곡성군청에서도 설명하기를 풍악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기분 좋은 산행 동악산(動樂山)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곡성 마을에서 장원급제자가 탄생하게 되면 이 산에서 노래가 울려 퍼졌다고도 한다.


소형차량 주차장을 나와서 산행들머리를 가다 보면 도림계곡의 명소가 있다는 표시가 있다. 주자의 무의계곡을 모방을 하여 구곡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도림사보다는 도림사 계곡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등산로를 들어서는데 그곳에 고추를 말리는 아낙네가 있어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등산로에 들어선다. 고추를 도로에 말리지 않고 등산데크에 말린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도 10명 내외이고 동악산 정상에서 100대 명산을 위하여 인증하는 사람들 여럿이고 종주를 하는 사람은 몇 명이 되지 않았다. 오늘의 등산일정은 도림계곡을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등산하여 종주를 하여 한 바퀴 돌고 동악산 정상을 지난 후 도림사로 하산하는 길이다.

등산을 시작하는데 덥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데 하늘은 아직은 그 낌새를 보여주지 않는다. 멀리 형제봉이 보이지만 등산로는 바로 오르지 않고 무덤이 있는 곳까지 옆으로 옆으로 이동을 한다. 무덤이 있는 곳에 친절하게 등산로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제 오른다. 중간중간에 돌탑이 있다. 그 돌탑 위에는 다양한 모습의 바위와 글귀로 채워져 있다.  처음에는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하였는데 사전에 공부한 사람이 이곳의 산악회가 만들었다고 설명을 한다. 돌탑군에 도착하니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이곳의 서편산악회라는 곳에서 30년 전이라고 할 수 있는 1997년 착공식을 한 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명소로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서편 산악회라는 말이 나오고 난 다음 궁금한 것이 발생하였다. 서편제 동편제라고 하는데 서편제는 어디고 동편제는 어딜일까였다. 국가유산 등에 조애가 깊은 분이 즉시 답을 하신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판소리의 동서 편은 섬진강을 기준으로 운용, 구례, 순창 등을 동편이라 하고 광주, 나주 등지를 서편이라고 한다 하였다. 지리산을 넘어가지 않고 섬진강을 중심으로 구분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동편서편은 그래도 우리의 방향과 일치하지만 좌우는 뒤바뀌어 있다는 사실은 지배자의 생각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봉우리가 가까이 있으면서 오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가파름이 보인다. 하지만, 주저할 수 없는 것이다. 산을 오르고 첫 번째 봉우리를 지나면 새로운 봉우리가 또 앞에 있다. 지인이 꼭 화산지역의 기생화산 또는 오름 같다고 한다. 높은 봉우리에 있는 화산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화산이 있는 것처럼 한번 치고 올라가면 또 올라가야 하는 봉우리가 있다. 이것이 형제봉까지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네이버 지도와 이정표가 다르다. 네이버 지도에는 형제봉이 아직인데 이정표는 500m도 남아 있지 않다. 다시 확인해 보니 네이버지도의 형제봉은 이곳의 이정표에서 대장봉이었다. 형제봉은 성찰봉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동봉쉼터를 지나고 형제봉으로 이동한다. 오르면서 오른쪽을 보니 공룡능선이라고 한다. 암릉길이 아름답다. 하지만, 오늘은 비예보가 있어서 마음에만 담으면 허전한 것도 있어서 그것을 다시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담는다.

형제봉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정상석은 없다. 그곳이 성출봉(동봉)이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아울러, 산악인 허영호선생이 이곳에서 등반을 하였다는 기념석이 있다. 차리리 이곳에 정상석이나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곳에서 공룡능선으로 들어가던가 능선길을 따라 종주계속하던가 할 수 있다. 우리는 능선길을 따라 종주를 계속하기로 하였다. 바로 앞에 둔 봉우리가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능선을 내려가면서 앞의 봉우리가 점점 높아진다.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담스러운 시간이 된 것이다. 저것을 넘는 시간이  무섭다. 그리고,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오는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우회로와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고민을 한다. 모두들 고민하는 것은 고민 속에 있을 때 갈림길에 있을 때이다. 우리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회로를 선택하였다. 배넘어재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성출봉은 동봉이고 대장봉은 서봉이다. 그래서 형제봉이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이제 배넘어재로 간다. 하늘은 흐려지고 있고 비바람이 불고 있다.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지만,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우리를 바쁘게 한다. 4명이서 걸으면서 한 명이 떨어졌다. 우리가 바쁘게 움직이면서 한 명이 약간 느리게 걷다가 보니 앞선 사람들이 멀리 사라졌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그리고 곡성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분은 앞서가는 사람들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하여 바쁘게 왔다.


사실 영화 곡성(哭聲)은 스릴러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나온 대사가 영화가 한동안 유행했다."뭣이 중한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맞은편에서 등산객이 오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이리로 가면 하산하는 것이 어떠냐"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니다"고 답을 하다. 우리도 질문을 한다.

"배넘이재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

그분들이 "있다"고 응답을 한다. 우리가 동봉에서 빠르게 이곳으로 온 것은 비가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멀리 이동하여 배넘어재에서 식사를 계획하였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가 올 때 식사를 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곳에 정자가 있다. 한차례 비가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그곳에서 휴식과 식사를 한다. 이곳까지 걸어서 오면서 동악산 정상이 멀었는데 갑자기 가까워진 기분이다. 그분들은 돌아서서 내려간다. 앞서거니 뒷서기니 하면서 배넘어재에 도착하였다. 그분들은 도림사로 하산을 하고 우리는 이제 동악산 정상으로 발을 옮길 것이다.

배넘어재는  과거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타고 넘어 다녔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신기하게 전남, 경남 등지에는 이러한 배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곳이 몇 있다. 전남 고창의 선운산에 배맨바위, 경남창녕의 화황산의 배바위 등이다.  예전에 홍수가 있었다던가 바닷물이 흘러다는 것 등이다. 그곳에서 배를 묶어두거나 배를 이용하였다는 전설이다. 육지의 산 위에 그러한 전설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지리산을 오를 때 장터목 대피소에서 식사를 위하여 취사장에 들어갔는데 비가 왔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를 마쳤을 때 비가 그친 생각이 난다. 오늘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비가 내리고 있지만, 그치기를 바라면서 하늘을 쳐다볼 뿐이다. 그렇게 많이는 오지 않는 비를 보면서 기상청 앱을 열어보니 1시간 이내에 1mm 이내로 온다고 예보가 되어 있다. 이제는 동악산 정상을 향해 걷는다. 배넘어재까지는 그렇게 줄어들지 않던 이정표의 거리는 정상을 향해 가는데 너무 빨리 줄어든다. 2.2km를 1시간도 안 걸려서 올라온 기분이다.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데크가 있다. 데크가 있기 전에는 험난하게 올랐을 정상을 이제는 데크로 오르는 것이다. 다만, 데크의 높이가 30cm는 되는 것 같다. 너무 높은 계단이다. 그 계단을 올라서는데 진한 곰탕 속에 들어서서 거인의 곰탕속의 살아 있는 고기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다.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오늘 6명 정도 만났는데 갑자기 도림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1일 2 산을 하였다고 한다. 반야봉을 올랐다가 와서 다시 이곳을 올랐다고 한다. 그분들의 체력이 대단하다고 감탄을 한다. 백대명산이 목적인 사람들이 인증을 위하여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고 한다. 1시간 만에 올라왔고 다시 내려간다고 한다. 우리는 느릿느릿 즐기면서 걷어서 내려갈 것이다. 어차피 하산하면 끝인데 무엇을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다. 하산을 하면서 전망대가 있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아직 거인의 진한곰탕이다 거인이 살아 있는 고기를 찾을 수 없도록 숲속으로 숨어들면서 갈림길로 내려간다. 신선바위로 우회를 하여서 하산을 할 것이지 바로 하산을 할 것인지 물어본다. 하지만, 데크가 한 없이 내려가고 있어 그길을 내려갈 뿐이다.

신선바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려가다 보니 다시 신선바위 갈림길이다. 그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신선바위로 간다. 신선바위에 대한 상상을 해본다. 어떤 사람은 신선의 모습, 나는 신선이 노는 넓은 바위라고 이야기한다. 그냥 추측을 하였는데 내가 상상한 것이 맞았다. 신선바위에 도착하니 우리에게 세상을 보여준다. 하늘은 흐렸지만, 구름은 저 위에 우리는 신선이 노는 세상아래에 있다. 그 넓은 바위에 앉아 바둑과 장기로 신선놀음을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도림사에 도착하니 공사장이다. 도림사라고 하는 현판이 있는데 소박하다. 이 글씨가 의제 허백련의 작품이라고 한다. 허백련 선생은 남종화의 화맥을 잇는 호남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당대 유행하던 새로운 기법에 한눈을 팔지 않고 전통기법만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허백련은 섬진강과 청류계곡을 좋아하여 곡성을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인연으로 도림사 산문에 이렇게 멋진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을 스치면서 지나가고 도림계곡의 구곡을 즐긴다. 옛 선비들은 도림사 계곡 곳곳에 암각문을 새겨놓고, 이곳을 성리학에서 이상향으로 삼은 청류동 구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주자의 무아구곡을 해동식으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제1곡 쇄연문, 제2고 무태동천, 제3곡 대천변, 제4곡 단심대, 제5곡 요요대, 제6곡 대은병, 제7곡 목원대, 제8곡 해동무이, 제9곡 소도원이다.

산을 내려와서 반나는 제8곡 해동무이가 있고 그곳 반석에 이런 글이 있다. 널찍한 반석에는 주희(朱熹)의 차관폭포운(次觀瀑布韻) 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이 보고 싶지만 아쉽다.

반석에 그것을 정리하여 두었고 반석마다 선비들의 풍류를 위한 시문 등을 암각하여 둔 것을 볼 수 있다. 요즈음 같으면 상상도 못 한 일을 조선시대 선비들은 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선비들이 붓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두면 석수가 그것을 파내었을 것이다.


누군가 이것을 정리하여 두었는데 그것을  옮겨본다.(출처 : 곡성레터)

주희(朱熹)의 차관폭포운(次觀瀑布韻)과 서산강론이다.


快瀉蒼崖一道泉

白龍飛下鬱藍天

空山有此眞奇觀

倚杖來看思凜然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

백룡이 푸른 하늘에서 날아내리는 듯

텅 빈 산에 이처럼 기막힌  장관이 있으니

지팡이 짚고 바라보는 마음이 활짝 열리네.     


조금 더 내려오면 ‘서산강론(西山講論)’도 있다.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주희는 당대의 대학자 채원정과 절친하게 지냈는데,  그와 유쾌하게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면서 그 글을 이렇게 각인하여 두었다. 주자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는데...

風月平生意, 江湖自在身

年華供轉徙, 眼界得清新

試問西山雨, 何如湘水春

悠然一長嘯, 絕妙兩無倫

평생 품었던 청풍명월의 뜻을 이뤄, 유유자적 강호에서 살고 있네.  

늙은 놈이 이게 웬 청승인가 싶겠지만, 마치 청춘으로 돌아간 듯하네.

별 뜻 없이 묻는데 서산에 비가 오면, 상수의 봄은 어찌 될 것인가.  

그대가 긴 휘파람으로 대답을 대신하니 우린 진정 벗일세.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곡성에서 한 끼를 해결하였다. 이곳의 인심을 알 수 있었다. 곡성에 있는 음식점을 맛집을 찾고 그곳으로 간다. 사실 첫인상이 중요한데 그렇게 첫인상은 좋지 않았는데 후한 인심에 다양한 음식이 우리들을 감동하게 했다. 다시 꽃무릇길을 지나 서울로 이동한다.

노을이 우리를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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