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의 산행, 더위 속에서 마주한 내변산의 속살
한 달 넘게 산다운 산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몸을 많이 썼으니 정비를 하고 쉬어야 한다”는 집안 최고 권력자의 엄명도 있었지만, 지독한 여름 감기까지 겹쳐 해발 100미터 남짓한 동네 야산만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산을 향한 마음은 막을 수 없어, 4년 전 산불 조심 기간에 아쉬움을 남겼던 내변산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설렘과 신기함으로 시작된 여정
서울을 출발해 세종을 거쳐 부안으로 향하는 길은 수소차와 함께였다. 인구가 많지 않은 부안에 수소 충전소가 두 곳이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곰소에서 편안하게 충전했다. 수소 충전이 처음인 동행들은 짧은 시간에 충전이 끝나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감회를 나누었고, 여행의 시작부터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내소사 주차장에서는 오후의 햇볕을 피하려는 계산으로 최대한 산 그늘 가까이에 차를 세웠다. 이 작은 지혜는 하산 후 뜨거운 차를 피하게 해준 고마운 선택이 되었다. 버스 종점을 지나 상가에 들어서자 특산품인 오디 관련 음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는 50대가 넘은 이들에게 입이 보라색으로 물들던 어린 시절의 달콤한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열매이다. 그 달콤함은 하산 후 맛보기로 하고, 이제는 무료입장이 된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을 통과했다. 오대산 월정사 길과 더불어 명품으로 꼽힌다는 내소사 전나무 숲길의 청량한 기운이 우리를 맞았다.
더위와의 사투, 그리고 능선에서 만난 선물
전나무 숲길을 지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관음봉 삼거리를 거쳐 직소폭포를 다녀온 뒤, 다시 관음봉 정상에 오르는 코스다. 하지만 산행 초입부터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가 우리를 덮쳤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비탈을 오르는 내내 작년 팔영산에서 느꼈던 극한의 더위가 재현되는 듯했다. 길에서 뱀을 보고 놀란 다른 등산객들을 스쳐 지나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땀으로 온몸이 젖을 무렵, 능선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곰소만의 풍경과 썰물로 드러난 갯벌은 힘든 오르막을 견뎌낸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소사를 조망하는 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르니, 뜨거운 한낮의 햇볕을 온전히 받고 있는 사찰의 모습이 평화롭게 다가왔다.
환상과 현실 사이, 직소폭포 가는 길
관음봉 삼거리에서 직소폭포로 방향을 틀었다. 내려가는 길에 마주친 등산객들에게 폭포 수량을 묻자 "적당히 있다", "거의 없다"는 엇갈린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물의 양과 상관없이 우리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폭포로 향하는 길의 경치는 환상적이었고, 계곡에 들어서자 시원한 냉기가 불어와 더위를 잊게 했다. 왕복 2km의 트레킹 코스는 시원한 개울을 끼고 걷는 길이라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마침내 도착한 직소폭포는 최근 비가 오지 않은 탓에 힘찬 물줄기 대신 조용한 흐름만이 남아있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고, 우리는 그 풍경을 배경으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체력의 한계, 그리고 현명한 포기
다시 관음봉을 향해 돌아가는 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허기를 채우며 너무 오래 쉬었던 탓일까. 재백이 삼거리에서 관음봉 삼거리로 향하는 오르막은 등 뒤에서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유난히 힘들었다. "해발 400미터 남짓한 관음봉이 이렇게 힘들다니..." 한 달간의 산행 공백이 체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겨우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 지쳐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세봉까지의 환종주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관음봉에서 바로 내소사로 하산하기로 했다.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달콤한 마무리, 잊지 못할 얼음물 한 잔
길고 힘들었던 산행 끝에 다시 마주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상가에서 마신 시원한 오디 주스는 갈증을 달래주었고, 가게 주인이 아무렇지 않게 내어준 얼음물 한 잔은 그 어떤 값비싼 음료보다 더 큰 감동과 위로를 주었다. 이번 산행은 더위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박한 인심 속에서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새긴 시간이었다.
사람이 왈 "몸 관리를 하여야 하지 그렇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며, 이제 사용을 많이 하였으니 정비를 하고 휴식을 한 번 취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한 것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