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이상한 나라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이다. 앨리스는 없다.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
올림픽이 한창이던 여름, 국가대표 선수의 머리카락 길이가 논란이 됐다. 이유는, 여자인데 머리가 짧아서. 이유는, 페미 메갈일지도 모르니까.
짧은 머리를 한 여자는 페미인가? 머리카락과 페미는 무슨 상관인가? 만약 페미라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몹시 의아하고 이상한 논란(?)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했던 건 이 이상한 음모론을 가치있는 발언인 마냥 받아 적어주고 확성기를 쥐여주는 이 나라였다. 나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이상했다. 너무 이상한 나라였다.
근데 전부터 계속 이상했다. 이 나라에 이상한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었다. 어디서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발 딛은 행성의 반대편 땅에서도, 내 바로 곁 주민의 마음속에서도. 지금같은 편리함을 조금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몇 년뒤에 이 땅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는데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떠올리지 못하고 어리고 늙은 것을 혐오하여 배척한다. 죽고 죽이고 고통에 발버둥치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미소짓고 사랑하고 침을 뱉는 이곳은,
그래. 여기는 이상한 나라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이상한 나라라는 사실을 깨달은 즉시 나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쐐기벌레가 내뿜는 물담배 연기처럼 흐릿하다 사라지고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 아니다. 무언가 하나 해결해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 온 원주민이다. 이상한 나라의 일부다. 나만 빠져나갈 수는 없다. 갈 곳도 없을뿐더러 모든 인간이 그렇듯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들도 혼자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다른 주민이 필요하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짧은머리와 페미 논란(?)같은 이상한 일들을 많이 겪는다. 사라지는 고양이의 수염 한가닥같이 미미한 갈등도 흰토끼의 회중시계같이 중요한 갈등도 수두룩하다. 이번 일은 회중시계급 갈등인 듯 했다. 나를 이토록 생각에 잠기게 했으니까. 나는 머리카락과 페미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다 내 머리카락 길이와 페미인 나의 상관 관계도 따져봤다. 이상한 나라에서 탈코르셋을 하겠다고 결심한지 벌써 삼년이 넘어간다. 지금 짧은 머리는 아니다. 나는 머리를 기르고 있다.
몇 년 전 탈코르셋을 처음 접했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상한 나라의 여자 주민들이 고를 수 있는 몇 없는 선택지를 늘리는 것, 여성성을 깨부수는 것, 바로 이거였다. 이 운동이야말로 내가 해야하는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옳은 것이었다. (이상함 속에서 발견한 몇 없는 분명함!)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한 그날 반나절 동안 고민하다 머리를 자르러 갔다. 자르기로 했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걱정됐는지, 미용실 사장님이 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냐고 마치 자신의 머리카락처럼 걱정스러워하며 애매하게 덥수룩한 머리로 만들어놓은 것도 그냥 수긍했다.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 사장님의 손길이라 그런지 정말 이상한 머리스타일이었다. (차라리 확 자르는게 보기에도 훨씬 나았을텐데...) 어쨌거나 한번 자르고 나니까 이깟 머리카락 따위로 뭘 그렇게 끙끙댔나 어이가 없을정도로 별 게 아니었다. 애매한 기장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붙잡고 매일 아침 고데기로 말다가 지쳐 좀 더 짧게 자르고, 더 짧게 자르고, 투블럭도 해 봤다.
머리를 자르니까 다른건 쉬웠다. 화장은 그 전부터 안 하고 있었고, 앞으로는 바지만 입기로 했다. 나풀나풀한 원피스와 치마, 시스루 블라우스를 침대 밑 깊숙이 쑤셔넣었다. 빛나는 플라스틱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귀걸이도 갖다버렸다. 이상한 나라 다이어트의 끔찍한 쓴맛을 제대로 본 직후였기 때문에, 앞으로 살빼기 위한 다이어트는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 몸을 위한 ‘건강한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남의 눈에 맞추든, 스스로의 눈에 맞추든 예뻐보이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상한 여성성의 틀을 깨부수는 운동에 동참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2년 뒤 어느날, 문제없고 뿌듯하던 이상한 나라의 탈코일상에 벼락이 떨어졌다. 터널속을 달리던 고속버스의 창가자리에서 뜬금없이 치마가 너무너무 입고 싶어졌다. 그 욕망, 갈망은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그때까지 한번도 그 정도로 강렬하게 전으로 돌아가길 원한적은 없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치마를 마구 검색하다 거의 결재 할 뻔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욕망에 정신이 멍하고 몹시 의아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치마가 입고싶은거지?
강렬한 욕망은 곧 가라앉았지만, 비슷한 형태로 꾸준히 들이닥쳤다. 어느날은 머리를 너무 기르고싶었다. 어느날은 원피스가 너무 입고 싶었다. 어느날은 거울속의 내가 끔찍해서 괴로웠다.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끙끙대며 버티다가 어느날, 집게삔을 샀다. 원피스를 주문했다.
집게핀을 하고싶은 이유, 원피스를 입고싶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것들이 너무 예뻐보였다. 그것들을 걸치고 싶었다. 내 몸에 걸칠 예쁜것들. 예쁜 것을 입고싶은건 예뻐보이고 싶은것과 동일한가? 나는 예뻐지고 싶었나? 예뻐지고 싶나? 그렇다. 그래서 내가 집게핀과 원피스를 원한건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건 상관없다. 기호와 취향이 있는 주민이라면 입고싶은 옷과 하고싶은 머리모양이 있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모두 내다버리는 것은 이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온 원주민 여자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지표로 삼은 가치를 재고한 것도 아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전하다. 머리를 자르는 것, 치마를 입지 않는 것, 화장을 하지 않는 것, 예뻐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 여성성이라는 틀을 비트는 행동들은 예쁨만을 외치는 이상한 나라에서 가치있고 중요한 사회운동이다. 사회운동은 내가 사회운동으로 하는 어떤 행위 자체가 좋아서 하는게 아니다.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보고 하는 것이다. 탈코르셋은 그렇다. 페미니즘과 짧은머리가 쌍욕을 먹는 이상한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그 취향을 실현하고싶은 내 욕망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나의 가치와 신념을 이겼다. 그게 몹시 허탈했다.
내가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성장하고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고 여겼는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거울나라의 땅을 딛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있는 것 같다. 뒷걸음질을 쳐도 너무 많이 쳐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아예 돌아선걸까. 탈코르셋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어 뒤돌아버린걸까. 자괴감이 들어서 견딜 수 없었다. 고작 집게핀 따위, 그놈의 이상한 집게핀 따위가 뭐라고.
나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주민은 사실 별로 없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지않는다는걸 알지만, 남의 눈에서 나를 보는것을 멈출 수 없다. 삼년만에 원피스를 입은 나. 삼년만에 머리를 묶은 나. 혹시나 내가 되돌아갔다는, 퇴보했다는 증거라고 여겨질까봐 조바심이 나는 나.
결국 들어버렸다. 머리 왜 안자르냐는 물음. 전에는 긴머리 싫다고 난리치더니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냐는 말. 나를 지켜보던 주민의 입에서 나온 그 가벼운 말이 바윗덩이보다 무거웠다.
내가 하고싶으면 해야지, 무엇보다 중요한건 나 자신이라는 말도 들었다. 맞는 말 같았고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주 개운하게 수긍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나는 내가 이 이상한 나라에서 제일 중요하지만, 나는 나 홀로 존재할 수 없고, 홀로 행복할 수도 없고, 나와 연결된 주민들, 나와 가까운곳에 있는 원주민 친구들부터 북극에서 굶어죽는 흰곰 주민과 매일 5만여 명이 살해당하여 먹히는 돼지 주민까지, 이 이상한 나라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행복해져야 나도 더 행복해질 수 있고, 나의 행동과 말과 선택들은 미세하지만 영향력이 있으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내가 가장 행복하려면 이 이상한 나라가 행복해야하는데 내가 하고싶은 모든 것을 다 하는건 이상한 나라의 행복에 득보단 실이 될테니, 그래서 개운하게 수긍하고 이상한 나라를 탈출할 수 없었다.
왜 머리카락 따위 옷차림 따위를 이토록 고심하는걸까? 이상하다.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 이상한 나라를 떠날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원망스런 마음이 드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매일 이상한 사건이 벌어져 어쩌면 내가 되었을, 내 곁이 누군가였을 주민이 스러진다. 그런 사건이 흔해빠진 이상한 나라가 증오스럽다. 흔해빠져서 익숙해진, 신경쓰지 않는 주민들이 밉다. 내가 그래서 밉다.
그러나 우리,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들은,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이상한 나라이며 이상한 나라가 우리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두근거리는 것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들은 이상한 나라에서 태어났다. 나는 이상한 나라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할 수 있는 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믿으며 최선을 다해 얼룩덜룩한 나뭇잎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 나뭇잎 건너 만난 것이 또 얼마나 이상한 상황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조금 덜 이상해지기를 믿고 그저 나아갈 뿐. 그저 좀 더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치열하게 답을 찾을 뿐. 그 과정에서 사라지려는 주민들을 꼭 붙잡고 우리 서로를 믿어보자고 속삭이는 것.
이상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이상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끝까지 매순간 갈등할 것이다. 그토록 갈등해서 괜찮은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답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더라도 이미 지난 날들을 품은 눈으로 읽을 때 답이 중요하게 느껴질까? 누군가에겐 아름답고 누군가에겐 지옥과 같은 순간들이 모여 이상한 나라의 하루가 이루어진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지난한 갈등과 괴로움 사이에서 회중시계의 바늘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이상한 나라에 매인 내 몸뚱어리를 벗어나 쐐기벌레의 한숨으로, 푸른 연기로 흩어지는날이 언젠간 올 것이다. 그 순간까지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 곳을 증오하고 어쩌면 평생 이해하지 못하며 몹시도 사랑하는, 이상한 나라의 원주민이라.
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