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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14. 2021

면면(面面)

면면(面面)

9.13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 시간 반만 걸릴 수도 있고 세 시간 반에서 더 걸릴 수도 있다. 자가용은 한 시간 만에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대중교통은 나를 세 시간 동안 멀미의 고통 속에 던져놓는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자가용이 필수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학교까지 나를 데리러 올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오랜만에 터미널에서 지루함으로 몸을 뒤틀며 한 시간 동안 앉아있다가, 오랜만에 고속버스의 딱딱한 의자에 몸을 누이고 먼지 쌓인 창틀을 응시했다. (이 멀미…. 이 고통…. 웩.)

세 시간 넘게 굽잇길을 차로 달리는 동안 멀미보다 괴로웠던 것은 기사님의 태도였다. 기사님이 내게 유난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욕을 하거나 성희롱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중·노년 남성 버스 기사님이었다. 평범해 보여서 방심했다.

내가 버스에 오르고 조금 기다리자 기사님이 표를 걷으러 왔다. 내 표나 다른 승객의 표를 걷어갈 때는 별다른 말이 없었던 기사님이 뒤쪽에서 한 승객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꽤 길게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표를 잘못 샀나, 승객이 버스를 착각했나, 아는 사람을 만났나 했다. 셋 다 아니었다. 기사님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짐 던져.

짐 던져 버린다.

돈도 없잖아, 어?

그냥 내려.

지갑에 돈도 없잖아.     

나는 뒤를 돌아봤다. 버스의 어두침침한 전등 아래, 승객의 모자 밑으로 동남아시아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분은 기사님이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기사님은 개의치않고 몇 번 비슷한 말을 더하더니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나는 잘못 들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아주 흡사한 상황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서 잘 들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집은 상주에 있다. 상주의 주 특산품인 곶감을 만드는 시기가 되면 곶감 농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많이 고용한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다. 한국인 노동자보다 못한 복지 조건도 웬만하면 제재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주 이외의 시골 마을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를 많이 고용한다. 나는 금산에 있는 학교에 올해로 3년째 다니고 있고, 대중교통으로 집에 가려면 대전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대전에서 상주로 가는 버스를 여러 번 탔는데 두 번에 한번은 동남아시아인처럼 보이는 승객을 봤고, 세 번에 한번은 기사님이 그 승객 혹은 승객들에게 인종차별 하는 것을 봤다.

두 시간쯤 멀미에 시달리다 상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숱한 정류장 중 하나에 잠시 멈췄을 때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 기사님께 묻자 시간이 부족해 바로 출발하려고 했지만,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서둘러 다녀오라는 답을 들었다. 화장실은 저 뒤쪽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말도 해주셨다. 나는 2분 만에 다녀왔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다음 정류장에 섰을 때 왼쪽에 함께 앉아있던 여성 세 분이 내리려고 했다. 그분들이 짐을 챙기며 일어섰을 때야 마스크 위로 동남아시아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한 분이 짐을 챙기다 조금 늦게 내렸다. 죄송하다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기사님은 그의 뒤통수에 욕을 내뱉었다.

다음 정류장에 한 번 더 서자 승객이 거의 나밖에 남지 않았다. 기사님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해서 덜덜 떨고 있었고, 추우니 에어컨을 꺼 주실 수 있겠냐고 물었다. 기사님은 이불 들고 오지 그랬어? 하고 장난스레 웃고는 돌아갔다. 곧 에어컨이 꺼졌다.

아직도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달려야 했다. 나는 나머지 시간 동안 창문 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몹시 어두컴컴했다. 햇볕 아래 흔들리던 초록 나뭇잎도 윤슬이 반짝이던 천변의 강물도 싱싱하게 자라던 금빛 벼들도 검은 하늘 아래 더럽고 악하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을 깎아 세워둔 태양열 발전기 사이로 풀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닭을 죽여 고기로 만드는 공장의 두껍고 높은 양철빛 기둥들 옆으로 버스는 달렸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풀숲 사이로 무언가가,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을씨년스러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두렵고 위험해 보였다. 세상은 잔인하고 징그러웠다.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속이 메스꺼웠다.

겹친 산 사이로 고속도로가 보였다. 고속도로를 탔으면 벌써 안락한 나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을 텐데. 한동안 겪지 않을 수 있었던, 보지 않을 수 있었던 장면을 계속 멀리할 수 있었을 텐데. 폭언을 당하던 그 흔들리는 눈에서 나를 봤다. 쌍욕을 뒤로 한 채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리던 뒤통수에서 나를 봤다. 2년 전 시드니의 버스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두렵고 억울해 덜덜 떨었던 나를 봤다. 나는 시드니 버스에서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에어컨이 너무 세다고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사님은 시간이 급해도 승객이 화장실 다녀오는 것을 기다려주는 사람이고, 동남아인에게 폭언을 일삼는 사람이다. 기사님은 자신이 인종차별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몹시 나쁜 것처럼 느껴진다. 아주 큰 일, 큰 사건, 큰 행동으로 인한 결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차별은 사소하며 집요하고 일상적이다. 시드니의 시내 한복판에서 나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나를 차별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자기가 하는 게 차별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기사님도, 그런 폭언을 유독 동남아시아인에게 서슴지 않는 것이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인 혹은 흑인 외국인이 버스에 탔을 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자기 모습을 의아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햇살 아래 빛나던 것들은 먹구름 아래 잔인했다. 전혀 알고 싶지 않던 먹구름을 목격해버려 속이 몹시도 찝찝했다. 먹구름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지. 짙고 옅은 차이가 있더라도 누구나 충격적인 구름 아래의 민낯이 있을 테지. 그런 생각이 들어 슬펐다. 어쩌면 나도, 먹구름 아래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추한 면면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면 역시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것일 테다. 나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폭력적이어서 아름다웠던 세상을 잔인하고 위험하게 보게 만드는 어떤 면이. 그리고 이토록 뜻밖이었던 나의 목격처럼, 내 다른 면의 목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두려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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