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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귤 Apr 10. 2021

시작

제주에 첫발

  제주도에 온 지 어느덧 1년 차. 취업하고 약 2년간 직장으로 인해 크고 작은 4번의 이사를 경험하고 19년 10월 제주 발령에 큰 불만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입이 삐죽 나온 채 시작한 제주 생활이 지금 돌아보면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1년이라고 생각될 만큼 좋았었다. 제주도가 그랜드캐니언 같은 거대한 자연경관이나 몰디브 해변 같은 아름다운 리조트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해외여행만 다니던 나를 제주도에 일 년에 한두 번 꼭 오고 싶게 만든 매력이 있는 곳임은 확실하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사진을 정말 못 찍는다는 것이다. 중간중간 있는 사진들은 '음식을 이렇게 맛없게 찍을 수 있나?', '여기가 이렇게 별로인 곳이었어?'라는 생각이 들며 책을 덮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잔뜩 보정된 사진들을 보고 간 장소들은 가끔 나에게 너무나 큰 실망을 안겨주곤 했다. 내 사진을 보고 간다면 기대치는 더 낮을 것이고 갔을 때 사진보다 나은 모습을 보면 더 큰 기쁨을 주지 않을까...?라고 포장해본다. 


  19년 9월 전라남도 광양에서 일하다가 제주도로의 갑작스러운 발령 소식을 듣고 내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놓고 상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아둔 휴가를 다 써서 유럽 여행을 갔다 왔었다. 유럽 여행이 너무 좋았었나 보다. 갔다 와서 삶의 의지가 다시 불탔다. 공항에 도착해서 집에 가자마자 허겁지겁 짐을 싸서 하루에 한 편 있는 녹동항에서 제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19.10.15 제주입도


  점심때쯤 제주에 도착해서 새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간단한 서류들을 작성하고 관사로 갔다. 관사에 짐을 풀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적당히 정리해두고 저녁을 먹으러 집 앞에 식당을 찾는데 갑자기 슬퍼졌다. 조울증인가...? 제주의 도심은 나의 젊음을 보내기엔 너무 어두웠고 고요했다. 퇴근하고 핫한 펍에 가서 맥주도 한잔하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소개팅도 하는 나의 꿈같은 직장생활을 제주에선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도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층 빌딩을 제주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제주엔 백화점이 없다. 면세점용 쇼핑몰들은 많지만, 도민이 이용할 수 있는 쇼핑몰은 작은 아웃렛과 로드샵들 뿐이다. 내 고향 순천에도 NC백화점이라는 작은 백화점이 있는데 여긴 더한 곳이었다.


많은 모바일 탑승권(제주도에서 평생 탈 비행기를 다 탄 것 같다.)

 

  이런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19년 겨울에는 육지를 자주 갔다. 비행기가 쌀 때는 쉬는 날 당일치기로 서울을 가서 친구를 만나고 오기도 했다. 이렇게 비행기를 자주 타고 돌아다니는 나를 친구들은 BTS라고 불렀다.


  하지만 육지 바라기 생활이 제주도를 방문하는 친구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제주도에 오기 전에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많이 했었는데 그 덕분에 친구들은 제주도에 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제주도에 오면 고맙게도 나에게 연락을 해주었고 나는 생각보다 많은 친구가 제주도를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항상 나를 부러워했다. "누구는 돈 주고 한 달 살기 하려고 제주도 오는데 너는 돈 벌면서 제주도 살고 부럽다."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친구들은 여행을 오면 제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나를 마치 제주에 10년도 넘게 산 토박이로 생각하는지 맛집 같은 여행 정보를 많이 물어봤다. 심지어 온 지 이틀 만에 제주도 좋은 곳 좀 추천해달라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탁에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본 정보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하지만 문뜩 이러면 '나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나?'라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인터넷에서 볼 수 없는 생생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가까운 곳을 하나씩 가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 다니다 보니 언제부턴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곳들을 찾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만 알고 싶은 제주 지도 그리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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