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싸름한 육아휴직의 추억
아내는 법조계의 경직된 분위기, 커리어의 연속성, 직장 내 변호사들 중 남자 변호사는 단 한 명도 육아휴직을 쓴 이력이 없는 상황을 고려해서 내가 육아휴직을 쓰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공공기관 재직 중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것이 다른 로펌보다는 자유롭고, 변호사의 업무는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고, 결정적으로 공동육아자로서 선호의 어린시절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육아휴직을 쓰기로 결정했다.
“부장님, 저 육아휴직 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막을 수는 없지... 앞으로 그럼 집에서 애나 키우려고?”
“허허... 아기 열심히 키워야죠.”
“아기 잘 키우고 복귀해.”
육아휴직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막상 상급자에게 말을 하려고 하니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걱정이 들기도 했고, 내가 진행중이던 사건을 인계 받을 다른 동료 변호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법으로 보장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 타인의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휴직을 하려고 하니 나의 휴직으로 인하여 업무량이 늘어나게 될 다른 변호사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없었고, 고맙게도 동료 변호사들은 육아 잘 하시고 꼭 돌아오시라는 말로 나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부장님과의 짧은 대화는 나의 육아를 독려하는 부장님의 말로 잘 마무리 되었지만, ‘막을 수는 없다’거나 ‘애나 키우려고?’라는 말을 듣고 일말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침 9시부터 밤 11시가 넘는 시각까지 1년에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같이 열람실에 앉아 공부를 했다.
커리큘럼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로 로스쿨에 입학했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해보니 그동안 해왔던 공부와는 결이 많이 달라서 로스쿨 재학 기간 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헐렁한 반팔티와 반바지에 시원한 맥주 한 캔, 오징어땅콩 한 봉지를 준비하고 혼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EPL 경기를 보는게 일주일 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flex 시간이었는데, 하필 로스쿨 기간 동안 맨유의 경기력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역시나 맨유가 답답한 경기력을 선보인 끝에 패배한 다음날, 로스쿨 수업을 앞두고 교실에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친구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맨유 졌던데? ㅋㅋㅋㅋ
나는 친구들의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에 순간 정색하며 짜증을 냈고, 옆에 있던 여자친구(지금의 아내)를 포함한 주변의 동기들은 당황한 듯 말을 줄였다.
그야말로 갑. 분. 싸.
그 날의 분위기를 회상할때면 얼굴이 붉어지지만,
나는 그날 뿐 아니라 종종 웃어 넘기면 그만인 일들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마음을 상하곤 했다.
특히나 남자들 사이에서는 흔하디 흔한 장난과 조롱에 쉽게 마음을 상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남자 친구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애를 먹었고, 그러다보니 외로운 순간도 많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은 경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 겪는 고질적인 문제들의 원인을 과거의 특정한 사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지 못하는 겁많은 어린 아이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나는 남자 무리의 공격적인 장난을 쉽기 웃어넘기지 못할 때면 아버지가 부재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가정 참여 현실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아버지들이 자녀와 교감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6분(OECD 회원국 평균 47분, 스웨덴 300분)에 불과하고(OECD, 2015), 맞벌이 남성의 가족생활 참여시간은 하루 평균 41분으로 여성의 3시간 13분의 5분의 1 수준이다(통계청, 2015a).
- 박지현, 주영아(2020) <워킹대디의 육아휴직 경험에 관한 개념도 연구> 논문 참조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80년대, 9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어려서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는 일찍 독립하여 청과물 도매업을 하셨고,
도매업의 특성상 경매가 이루어지는 새벽 시간에 출근을 하고, 가끔 술에 취하여 일찍 들어오는 날을 제외하곤 대부분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을 하셨다.
어린 나이에 나와 누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의 모습이 정겹기 보다는 조금은 무서웠고, 아버지가 일찍 오시는 소리가 들릴 때면 침대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니, 아버지 또한 온 힘을 다해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고, 치열하고 거친 일터에서 굳건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초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아버지에게 자식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삶에서 후순위로 밀려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관련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모두 끄집어 내기 위해서 그다지 많은 양의 마들렌 쿠키가 필요하진 않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생일 선물 중 가장 최초의 것은 모형 M16 소총이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어려서부터 밥 먹는 걸 귀찮아하고, 운동보다는 방에 앉아 WWF(현재의 WWE의 전신) 레슬링 비디오를 보거나, 드래곤볼 만화책을 보고 반투명 종이에 대고 선을 따라 그리는 걸 좋아했던, 신체적으로 유약했던 내가 보다 ‘남자답게’ 크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형 소총을 생일 선물로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매년 생일 때마다 내가 엄마를 졸라 받고 싶었던 선물은 커다란 레고 박스였다.
커다란 레고 박스와 모형 소총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에는 아버지와 내가 함께 공유한 시간이 절실히 부족했다.
선호가 태어나고, 별다른 고민 없이 육아휴직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선호에게는 아빠와 살을 부비며 함께 노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결핍을 선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육아휴직 경험에 대한 지배적인 내용으로는 체력적으로 또한 동시에 정서적으로 ‘힘들다’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조부모나 외부의 도움이 없이 처음으로 육아를 경험한 연구참여자들은 신체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중략)
육아휴직을 경험한 아빠들은 모두 ‘행복감’을 느꼈다고 하여 가장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정서로 나타났다.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데에는 ‘여유’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회사 일에 지쳐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아이와 함께 하면서 생기는 행복한 감정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고 하였다. 전적으로 육아를 담당하느라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외로움, 고립감, 부담감과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느낀 연구 참여자들조차도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행복감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표현하였다. 아이를 키우는 경험 동안에 느끼던 정서는 단 하나일 수 없고, 외로움이나 부담감과 같은 정서 속에서도 행복감을 통해 보상을 느끼고 있었다.
- 최새은, 정은희, 최슬기(2019) <육아휴직제를 사용한 남성의 가정 및 직장에서의 경험 연구> 논문 중 일부 발췌
<82년생 김지영>은 일종의 현상이었다.
<82년생 김지영>만큼 공감하는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비난에 이르는 사람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작품이 또 있어나 싶을 정도로 격렬한 대립이 있었고, 최근 Netflix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 <D. P. 개의날>이 남자들의 <82년생 김지영>이라고 불리는 걸 보면 여전히 인권의 문제가 성대결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듯 하다.
동료 변호사와 함께 술을 마시며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던 적이 있는데, 그 변호사는 ‘52년생 김지영’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82년생 김지영’은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30여년의 시간 동안 여성인권이 많이 신장되었고,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82년생 여자들의 경우에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묘사된 경험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
<D. P. 개의날>을 남자들의 <82년생 김지영>이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드라마에서 묘사된 가혹행위가 지금의 군대에서는 실질적으로 발생하기 어렵고, 따라서 <D. P. 개의날>에 공감하는 군필자들이 실제로 그런 일을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직접 아이를 출산하지 않았고, 군복무도 4주의 군사훈련을 마친 후에 공중보건의 근무로 대체했기 때문에 어쩌면 양측 모두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나보다 1달 가량 먼저 복직한 아내를 응원하며, 낮시간에는 선호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느꼈던 행복함으로 나의 유년시절의 결핍을 채워나갈 수 있었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신장되면, 그 이익을 종국에는 사회 구성원 전부가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육아휴직을 제도화 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지만, 누군가의 희생과 투쟁을 통해 그 어떠한 상급자도 나의 육아휴직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투쟁의 결과물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오징어 게임이 아니다. 내가 더 많은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빼앗아야 한다거나, 내가 누리고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저지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왜곡된 사회 구조와 편견에 대항하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아픔을 보듬으려는 노력과 공감을 통해서 권리의 외연을 점점 더 확장해 나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출산과 육아로 인한 어려움이든 폐쇄된 군부대에서 겪는 어려움이든 다를 바 없다.
선호가 태어난 이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다.
내가 선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내가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아버지와 함께한 유년시절의 기억 중에,
푸르른 여름날 아버지가 나와 작은 누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무말 없이 팔달산 한바퀴를 쌩쌩 달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잔상처럼 흐릿하긴 하지만 내 유년시절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순간이다.
작은 누나도, 아버지도 모두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육아휴직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덕분에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선호와 함께 선호의 찬란한 유년시절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3월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주저없이 육아휴직을 할 것이다.
여전히 육아휴직을 하고 싶지만, 회사생활을 하며 겪게 될 유무형의 불편함과 불이익이 두려워 육아휴직을 주저하는 사람들도 용기를 내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불편함과 이익에 대해서는 함께 연대하여 싸워보자.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