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유치원> 다시 읽기
새벽녘 아내가 들뜬 목소리로 나를 깨워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부스스한 얼굴로 나름 침착하려 애를 썼을 때만 해도 감동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똑같이 귀하고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막상 감동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초음파 영상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했을 때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 당황스러움은 아들보다 딸이 더 좋기 때문이 아니었다.
초보 아빠, 엄마들이면 자연스럽게 갖게되는 편견이겠지만, 왠지 딸이랑은 잘 놀아줄 자신이 있고, 아들이랑은 잘 놀아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막상 선호를 키우다 보니, 신생아기와 영아기 때에는 남녀 구분이 무색함을 알았다.)
내가 아버지와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많이 없기 때문일까,
나의 큰 관심은 선호와 어떻게 놀아줘야 선호가 그 날 하루 ‘인생 참 만족스럽구만!’이라고 생각하며 곤히 단잠에 빠질 수 있을까였다.
선호가 50일이 되기 전에는 아내가 2시간마다 모유수유를 했고, 나는 그 사이 집안일을 하고, 아내가 잠시라도 편히 눈을 붙일 수 있도록 선호를 캐어-어쩌면 관찰에 더 가까울지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하루였다.
선호가 53일만에 통잠을 자기 시작한 이후에는 나와 아내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고, 낮에 선호와 놀아주는 시간도 점차 늘어났다.
선호는 누워서 모빌을 보며 웃는게 놀이의 대부분인 시기를 지나, 생후 84일에 목을 가누기 시작했다.
아직 레고는 선호에게 위험한 장난감이었고, 모형 소총은 역시나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는 선호를 위한 동화책 2권을 샀다.
정말 신기하게도 선호는 동화책 2권 중 한권은 유심히 보았고, 나머지 한 권은 싫어하는 눈치였다.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선호도 취향이 있다는 사실에 나도 아내도 꽤나 놀랐다.
선호는 안녕달 작가님의 당근 유치원을 좋아했고, 나와 아내는 <당근 유치원>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계속 읽었다!
그렇게 읽고, 또 읽고, 계속 읽다보니 나도 아내도 안녕달 작가님의 빅팬이 되었다.
마음 한 구석에 ‘어차피 동화책이 뭐 별거 있겠어? 아이들이 읽는 건데...’라는 나의 오만한 편견은 안녕달 작가의 책들을 읽으며 말끔히 사라졌다.
안녕달 작가님의 작품은 거의 다 구매해서 선호와 함께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계속 읽고 있는 중인데,
선호가 제일 좋아하는 <당근 유치원>, ‘영화 <버닝> 이전에 내가 있었다!’고 외치는 듯한 가슴 뭉클한 <할머니의 여름 휴가>, 깜찍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수박 수영장>, 등장 인물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메리>, <메리>와 세계관을 같이 하는 듯한 <왜냐면>,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되어 버려진 존재의 꿈을 연민의 마음으로 보듬는 <쓰레기통 요정>, 아직은 해석이 어려운 <안녕> 모두 읽으면 읽을 수록 새로운 내용이 보이는 수작들이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당근 유치원>은 이 세상의 첫째들을 위한 책이다.
<당근 유치원>은 빨간 토끼가 당근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곰 선생님이 맘에 안들어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다가, 자기가 만든 코끼리를 보고 멋지다고 해주고, 장난감을 양보하지 않는 친구와 다툼이 생기자 자기 편을 들어준 곰 선생님이 너무 좋아 청혼까지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토끼는 다른 토끼들과 달리 얼굴이 빨갛고, 어찌보면 애정결핍처럼 느껴지는 행동을 한다.
동화책은 주인공 토끼의 마음의 변화를 섬세하고 은은하게 표현하는데, 읽고, 또 읽고, 계속 읽다 보니, 빨간토끼가 왜 항상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빨간 토끼는 동생이 둘이 있는데, 첫째 동생은 같이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이기는 하지만 엄마나 아빠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때이고, 둘째 동생은 이제 막 태어난 선호만한 동생이라 항상 부모님의 케어가 필요한 상태다.
이럴 때 첫째는 항상 서럽다.
나도 아내도 3남매의 막내라 사랑만 받고 커서 빨간 토끼의 서러운 감정은 어쩌면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물론 막둥이들도 항상 집에서 무시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냥 기분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엄마, 아빠 품을 독차지 하고 싶지만 동생들을 위해 의젓하게 참아내야만 했던 삶의 무게가 빨간 토끼에게서 느껴지기까지 당근 유치원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빨간 토끼의 삶의 고독을 알게된 후에야, 벌겋게 상기된 빨간 토끼의 얼굴이 애처롭게 느껴졌고, 큰 누나의 얼굴도 처형의 얼굴도 떠올랐다.
<당근 유치원>에서 첫째의 고독을 읽은 후에도, 나와 아내는 선호와 함께 <당근 유치원>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었다.
하루는 아내가 설거지를 하며 나에게 “오빠, <당근유치원>에서 유치원 가는 날에 날아가는 새의 방향이 다른거 알아?”라고 말했고, 나는 그제서야 곰 선생님이 맘에 들지 않아 유치원에 가기 싫은 날은 새가 반대 방향으로 날고, 곰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제일 예쁜 당근 옷을 입은 날은 새들도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내와 대화를 하다보면, 읽어도 읽어도 미처 알지 못했던 섬세한 표현들을 서로에게 알려주곤 한다.
<당근 유치원> 뿐 아니라 안녕달 작가님의 동화책에는 그런 그림들이 무수히 많다.
나와 아내와 선호가 안녕달 작가님의 동화책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별은 대략 수천 만 년에서 수십 억 년까지 살 수 있다. 이 때 질량이 작은 별은 오래 살지만, 질량이 아주 큰 별은 수백 만 년밖에는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별의 크기가 클수록 더 밝으며, 그만큼 더 많은 수소가 에너지 방출을 위한 연료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별의 일생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 2011. 6. 20., 홍준의, 최후남, 고현덕, 김태일)
선호는 이제 이도 두개 나고, ‘애기, 애기’ 하며 옹알이도 하고, 엄마 아빠와 눈도 마주치며 감정을 표현한다.
그래도 선호가 가장 잘 하는 의사표시 방법은 여전히 우는 것이다.
처음 아내와 함께 산후 조리원에 들어가 모자동실을 했을 때, 선호가 울음을 터뜨리면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때랑 비교하면 스스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고 자신할 정도이지만, 여전히 선호에게 지금 필요한 것, 선호가 불편한 것, 선호가 계속 하고 싶은 것 등등을 알기에는 나의 내공이 미천하다.
선호가 보내는 신호를 잘 해석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내가 별의 나이만큼 산다고 해도 선호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호의 마음 속에는 말로 할 수 있는 것과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기 싫은 것이 하늘의 별만큼 반짝일테니 말이다.
그래도 내가 선호와 작별 인사를 하는 그날까지, 매일매일 선호의 마음 속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별자리를 그려볼 것이다.
선호가 ‘인생 참 만족스럽구만!’이라고 생각하며 곤히 단잠에 드는 날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도 <당근 유치원> 일독 하러 출바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