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지만 용기를 낸다면
선호가 잠을 자느라 잠잠할 때면, 다른 것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들어 선호가 있는 것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평생 책임져야 할 존재, 독립할 때까지 우리 옆에 가까이 있을 존재, 우리가 함께 살아갈 때 늘 최우선순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을 존재가 눈앞에 있다. 양육자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취약한 존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85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선호의 존재는 내게 낯설고, 신기하다.
공동육아일기. 공동육아에 관해 어느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산부인과에서 민국오빠가 선호를 처음 안았을 때부터?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와서 둘이 처음으로 신생아인 선호을 목욕시켰던 때부터? 선호가 밤잠을 5시간 이상을 자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가 식사를 여유롭게 챙겨 먹을 수 있게된 때부터? 모유만 먹었던 선호가 분유를 먹기 시작하며 오빠도 수유를 할 수 있게 된 때부터? 선호가 조금 더 일찍 자고 밤과 새벽을 잇는 시간 우리에게 꿀맛 같은 자유가 주어진 때로부터? ㅎㅎ 공동육아일기는 그 시작점인 오빠의 육아휴직 결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오빠가 배우자 출산휴가(10일 한도) 외에 육아휴직(1년 한도, 오빠네 회사는 3년 한도)을 신청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일단 부정적이었다. 오빠의 커리어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출산해야 하는 산모에게 90일의 출산휴가는 필수적이었지만, 로펌에서는 산모인 변호사가 3개월도 길다고 2개월 내에 복직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변호사에게 출산과 육아로 인한 휴직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인식이 박혀있는 내게 배우자의 육아휴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선택사항도 아니고, 안중에도 없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민국오빠는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 나의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은 오빠가 육아휴직을 신청할 때 맞닦뜨렸던 부장님의 인식, 오빠가 맞닦뜨렸어야 할 회사 내의 남편의 육아휴직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시선과 동일했다. 오빠는 변호사로서 말했다. "그런 부정적인 인식과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법으로 강제된 거잖아. 법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으니, 분위기는 분위기만으로 끝나고 육아휴직을 막을 수는 없는 거지. 그게 법의 힘이라고 생각해" 오빠의 쿨한 육아휴직 신청은 변호사인 나도 부끄럽게 했다.
그렇게 우리의 공동육아는 시작되었고, 오빠는 나와 세상의 공동육아의 전파(?)에 일조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출산휴가만을 사용하고 복직(이직)하고자 했던 나도,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내가 다닌 로펌은 1997년부터 지금까지 육아휴직의 전례가 없었다. 대표 변호사님은 내가 실질적으로 퇴사를 한 것이고, 복직을 하더라도 다른 회사로 이직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다시 한 번 쿨하게 "경력 공백을 우려하는 것이라면 기한을 넉넉하게 신청하라"고 하셨다. 출산 휴가 기간이 끝나갈수록 복직에 대한 압박감이, 그리고 경력의 공백에 대한 염려가 상당했는데, 육아휴직 처리로 적어도 경력 공백에 대한 걱정은 덜어 냈다.
인생을 감히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우리가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민국오빠와 내가, 선호와 온전히 함께 있으면서 선호를 돌보는 이 시간이 값지다. 그래서 요즘은 하루하루가 귀하다. 민국오빠가 선호의 응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엉덩이를 닦아주려고 할 때, 오빠의 넓직한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선호의 발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옹알이를 한다든가, 자기 손을 먹는다든가, 손을 천천히 움직여 딸랑이를 잡으려고 한다든가, 키득키득 웃는다든가... 하는, 무엇인가가 달라진 선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재밌다. 선호가 얼른 커서 우리가 모두 휴직하는 이 시간에 마음껏 놀러다니면 좋겠다!
마음껏, 누리자.
- 공동육아를 하는 아내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