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와 ‘당신의 이문강’ 사이 어디쯤
코 끝이 찡해지는 겨울이면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다.
코 끝이 찡해지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남몰래 펑펑 눈물을 쏟게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윤희(이지아 분)의 "맨날 '큰 차 사자. 식구들 다 태우게 큰 차 사자'고 했잖아. 9인승 차가 왜 필요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식구들이랑 밥먹는다고..그런 말이 나와? 나는 거기 없는데" 대사를 들으며 아내는 “오빠랑 똑같다.”라고 말했고, 심각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머쓱해서 웃고, 아내는 머쓱해서 웃는 나를 보며 웃었던 드라마다.
나는 (코로나로 외출이 제한되기 전까지만 해도) 집 안에서 한달이고 두달이고 재밌게 놀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집돌이다.
유년시절이 화목한 가정의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지만,
윗집에서 500원을 훔쳤다가 아버지한테 많은 종류의 매로 정말 녹초가 될 때까지 맞았던 기억과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시간이 잡혀 있는데도 면담이 싫어 엄마를 약올리며 도망다니다가 몹시 혼났던 기억 정도를 제외하고는 나는 언제나 우리집이 좋았다. 그 두번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년시절부터 집에 오면 항상 마음이 편했다. 집 밖에 나가면 상대적 애정결핍을 느낄 정도로 집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고 컸기에 이불 밖은 항상 위험한 곳이었다.
독립하여 아내와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집은 항상 안식처가 되어야 하고, 나도 아내도 선호도 집에 오면 안온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을 갖기 위한 ‘내 집 마련의 꿈’이 ‘아! 始發 꿈’이 되어버린 현재에도 여전히 꿈을 꾸며 살아간다.
가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타적이지 않은 가족주의는 나쁘지 않은, 오히려 좋은 가치관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가족주의에 내재하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익숙해져 이제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골프, 피아노, 그림, 게임 등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도전해 봤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즐기고 싶은 취미생활은 사진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보며 street photographer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빠 사진사들이 그렇듯 내가 찍는 사진의 90% 이상은 아내와 선호가 담긴 가족 사진이다.
육아로 몸이 너무 힘들어도,
하루가 다르게 크는 선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에 선호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은 내게는 큰 기쁨이고,
‘사진 좋다!’는 아내의 칭찬은 언제나 나를 춤추게 하기에, 최고의 아빠 사진사가 되고 싶은 꿈을 꾼다.
이쪽 영역에서 최고봉 중에 한 분이 전몽각 선생이다.
전몽각 선생이 생전에 출간한 <윤미네 집>은 그의 딸 ‘윤미’가 태어났을 때부터 결혼하여 독립할 때까지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진집이다.
김포공항에서 윤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윤미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주인 없는 방에는 커튼만이 방안 가득 펄럭이고 있었다. 그 허전함과 서운함이라니! 집사람은 돌아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뜨거운 무엇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때부터인가. 나에게는 시간만 생기면 김포쪽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는 좋지 않은 습성이 생겼다. 곧 윤미가 돌아올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그쪽 하늘에서는 웬 비행기가 그토록 수시로 뜨고 내리는지?
<윤미네 집> / 전몽각 / PHOTONET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의 사진을 엮어 사진집을 출간할 정도로,
딸의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직접 기록하고 싶어 딸의 결혼식날 ‘윤미를 데리고 들어갈 때도 광각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노파인딩으로 찍고 싶’을 정도로 사랑으로 키운 딸이,
결혼한 직후 신랑을 따라 멀리 미국으로 떠났을 때의 아버지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문구를 읽으며,
사진집의 사진들이 더더욱 그리움으로 가득해졌고, 언젠가 선호도 훗날 성인이 되어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움으로 가득한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코 끝이 찡해지기에, 아내에게도 한 번 읽어보라며 책을 건넸다.
그리고 잠시 후, 눈물을 참지 못해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아내를 발견하곤, 휴지를 건네며 토닥였다.
<윤미네 집>은 윤미씨의 성장 과정을 담은 책이지만, 동시에 작가의 아내-이문강님-의 삶도 기록된 책이다.
삼남매를 키우며 녹초가 된 모습, 수유하는 모습 등 가정의 일상사가 담긴 사진들을 전시회를 통해 여과없이 대중에 공개한다고 했을 때, ‘아무 때나 카메라를 들이댈 때도 저러다 말겠지 하고 근근이 참았는데 이제는 만천하에 공개하겠다고 하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이문강님이 <윤미네 집>을 재발간 하는 데에 동의한 이유는 남편이 가고 없는 지금 무언가 그를 위해 하고자 하는 마음과 남편이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것을 묻어둘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이 담긴 이문강님의 짧은 회고록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2009년 11월
당신의 이문강
아내는 회고록 마지막의 ‘당신의 이문강’이라는 문구를 읽고 차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문구를 다시 읽어보니 그 어떤 강제도, 그 어떤 폭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주권 권력의 특징적인 특권 중 하나는 바로 생사를 결정하는 권리였다”(푸코, <성의 역사>, 1권, p. 119). <앎에의 의지>의 말미에 나오는 푸코의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진부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생사를 결정하는 권리’라는 표현을 법제사에서 처음 마주치는 순간은 바로 ‘생사여탈권’이라는 정식에서인데, 이는 주권 권력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가지는 무조건적인 권한을 말한다.
(중략)
얀 토마는 칼푸르니우스 플라쿠스가 수사학 연습용으로 제시했던 한 사례를 참조하는데, 거기서는 어떤 아버지가 이 권한으로 자기 아들을 형리의 손으로 죽이려고 한다. 아들은 이에 항거하면서 정당하게도 아버지 손에 죽고 싶다고 요구한다.
- <호모 사케르> /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지금은 이런 저런 변명을 이유로 사익을 추구하면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에 공익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때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었다.
그 시절 접했던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는 ‘생사여탈권’에 관한 기록이 있다.
로마시절, 아들의 목숨과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내가 좋은 가치로 생각하는 가족주의가 품고 있는 가부장 문화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쩌면 아들(자식)의 삶은 아버지(부모)의 것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문강’이라는 문구를 읽고, ‘나의 아저씨’라는 표현에서 가족주의의 폐해를 찾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비약일 것이지만,
‘나의 아저씨’와 ‘아저씨’ 사이는 박동훈(이선균 분)과 차태식(원빈 분) 사이의 간극만큼 벌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호를 키우며,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좋은 것을 사주고, 마음을 쏟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에 따른 보상심리가 생기는 듯 하다.
나랑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왜 엄마만 보면 꺄르르 잘 웃을까?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하면 어떠려나... 서운하지는 않을까? 등등...
거의 대부분의 계약 관계는 의무와 권리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기에,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양육의무를 다 했으니 그에 대한 권리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옹알이 중인 선호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환하게 웃으며 첫니를 보여주는 정도 뿐이니, 권리와 의무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호의 삶이 결코 나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선호의 삶은 오로지 선호의 것이고, 나는 부모로서 양육의무를 다하면 그만인 것이다.
4년차 변호사이지만, 여전히 법정에 갈 때면 긴장이 된다.
그럴 때마다 아내와 선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어떠한 상대방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호랑이 기운이 샘솟는다.
앞뒤가 똑같은 동전처럼, 육아는 앞뒤가 똑같이 의무만이 있다.
앞뒤가 모두 의무만이 새겨진 마법같은 동전이 나에게는 자신감을 가져다 주는 행운의 필승카드가 된다.
그 마법의 동전을 항상 간직한 채, 선호의 삶은 오로지 ‘나의 선호’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강제와 폭력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