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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Oct 23. 2021

아내, 우리집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

생일엔 아이처럼 투정을 부려도 무사하다.


아내는 8월에 복직을 했고, 나는 9월에 복직을 했다.

내 생일이 8월 말이라, 올해 나의 생일은 선호와 하루 종일 함께였다.

고된 출산을 마치고, 3개월간 분유 없이 오로지 모유수유로 선호를 키우다, 8월에 복직을 한 아내는 곧바로 직전에 퇴사한 2명의 변호사의 일을 도맡아 했다.

저녁에 선호를 함께 씻기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했고, 집에 와서는 하루종일 선호를 보느라 고생했다며 나에게는 육아 퇴근을 시켜줬다.

올해 생일에도 아내는 고된 몸을 이끌고 일찍 출근해서 쉼 없이-말 그대로 쉼 없이- 일을 하고 퇴근해서 나의 생일상을 차려줬다.


그 날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데,

선호는 그 날 따라 유난히 많이 울고 보챘다.

(아빠가 공식적으로 더 늙게되서 그랬을 것이다.)

나도 지칠대로 지친 하루였고, 그 피곤함은 이내 국거리 반찬거리를 바리바리 사가지고 퇴근한 아내에게 향했다.

나는 말이 없었고, 절대 아닌척 하지만 누가봐도 삐진 상태였다.


훗날 아내한테 들었는데,

그날 아내는 끝까지 웃으며 나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고 했다.

하마터면 매우 큰일날 뻔 한 하루였다... (아내의 인내심이 바다처럼 넓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럴 때면 우리집의 가장(아름다운 사람)은 역시나 아내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는 공룡


나는 공룡 흉내를 내고, 아내는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마흔을 앞둔 나는 체력이 달려 쇼파에 걸터 앉았다.

(선호를 웃기기 위해서라면 우리집을 쥬라기월드로 만들 각오가 되어 있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다.)


까르르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어 선호를 봤다.

아내는 지치지도-지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빵긋빵긋 웃으며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선호가 아빠 안경 만지는 걸 좋아해서 내 안경은 뿌연 연기로 가득한 날이 많은데,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을까.

햇살이 스며든 공기가 선호와 소망이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내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해버린 두 사람이 내 눈 앞에서 웃고 있었고,

나는 분명히 행복했고, 알 수 없이 두려웠다.



내가 먼저 떠나면, 두 사람은 웃을 수 있을까


나 없이 홀로 남을 아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선호는 모르게 침대 위에 우두커니 쪼그려 앉아 상념에 빠져 있을 아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웠고, 충분히 애처로웠다.



라라랜드


로스쿨 재학 시절, 기말고사를 마치고 아내랑 영화 라라랜드를 보고 여행을 떠났다.

우리 둘다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서로 싸운 것 같은 날이었다.

여행지에 가서 한참 수다를 떨고 나서야 우리는 왜 서로 말을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는 불안했던 거다.

나도 아내도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도 언젠가는 이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지 모른다.



팬텀쓰레드


아내는 영화 팬텀쓰레드를 보고 한참을 울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그런 아내의 손을 잡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사랑은 뭘까라며 생각했다.

아내는 알마를 위해 독버섯임을 알고도 기꺼이 먹는 우드콕을 보며 사랑을 생각했고,

나는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확신으로 우드콕을 구원한 알마를 보며 사랑을 생각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나와 아내는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다.

나와 아내는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음을 안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다.

우리는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

(조금 전 내 글을 읽은 아내가 '그래도 가끔 긴장 좀 하지?'라며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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