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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공사칠 Mar 29. 2024

흩어지는 종달새 소리

차이코프스키 - 3월: 종달새의 노래

악기 연습은 무술 수련과 비슷하다. 하단 차기로 상대의 허벅지를 부수기 위해선 수백 번 샌드백을 차야 한다. 한두 번, 혹은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동작이 내 것이 될 리 없다. 이를 몸에 새기기 위해선 잡념을 비우고 몰입하기 위한 단순 반복 시간이 필요하다. 악기 연습도 마찬가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싶을 때 즈음 악보가 마음속에 들어온다. 수도 없이 반복 연습하던 중 어느 날, 내면에 섬광이 튄다. 운이 좋은 순간이다.


마음속에 피어 오른 섬광은 잔잔하지만 드라마틱하게 나를 지배한다. 음이 이전과 다르게 들리면서 감각이 예민해진다. 울컥한 기분도 들고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다. 여러 느낌이 소용돌이친 후 몰입에서 빠져나왔을 때 경험하는 고요가 좋다. 섬광은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 언제든지 다시 타오르겠다고 나와 약속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내면의 빛이 새어 나옴을 느꼈다. 러시아의 대가 차이코프스키는 1년 12개월을 모티프로 한 피아노 독주곡집을 발표했다. 그중 3월의 제목은 종달새다. 약간 쓸쓸하면서도 겨울에 얼어붙었던 생명이 조금씩 깨어나는 3월에 종달새가 아침을 연다. 종달새 소리가 쓸쓸하게 들리다 이내 경쾌함을 회복한다. 그러다가 다시 쓸쓸한 테마가 반복되고 종달새의 소리를 연상하는 몇 음이 반복을 거듭하다 서서히 사라진다.


나는 차이코프스키가 관찰한 종달새 소리를 맛보던 중 새 울음의 반복을 연상하는 곡 말미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모두가 종달새의 울음소리에 집중할 때 한 작곡가는 그의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순간을 포착했고 이는 내 마음의 주파수와 맞아떨어졌다. 연주의 맛이 좋아 그 부분을 치고 또 쳐본다…


모두가 음표를 논할 때 쉼표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나 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내가 쌓은 성을 내 손으로 부수기 위함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것을 잊기 위함이다. 기합을 지르는 이유는 허공에 한 획을 긋고 시간 속으로 사라지기 위함이다. 획이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다. 사라지던 순간의 추억이 나의 밑거름이 되어 새 날을 만들기 때문이다. 등등.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으리라. 곡의 말미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하나의 음악이 스승이 되어 이토록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단 사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정작 악보는 한국말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의 명령에 몸을 던지니 마음속 빛이 새어 나왔을 뿐. 아직도 종달새 소리가 들린다. 끝나가는 3월의 달력처럼 누군가의 스승이 된 소리가 암흑 속으로 몸을 숨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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