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몸쓰기와 글쓰기를 겸비한
지금까지 아마추어 시합 1전부터 3전까지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며 10편의 글을 마무리한다. 다음 글부터는 4전부터 일어난 세미 프로 시합을 돌이켜보며 어떠한 일들이 있었나 돌아보려 한다.
아마 <링 위의 격투가> 쓰기는 내가 시합 출전을 멈추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가 마지막 시합이 될지 진심으로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시간과 몸이 허락해 전적을 쌓고 있지만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격투가로서 적은 나이도 아니고 생업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인 내가 격투 선수로서 운동에 몰입하고 이러한 여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몸쓰기와 글쓰기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몸 쓰기와 글 쓰기만이 동물과 사람을 구분 짓는다. 어떠한 동물도 몸 쓰기를 통해 한계를 겪으며 스스로를 극복하지 않는다. 어떠한 동물도 글 쓰기를 통해 무의식 속 자기를 발견하고 세상으로 꺼내지 않는다. 몸쓰기와 글쓰기. 두 가지 위대한 습관만이 사람 냄새를 더욱 짙게 하고 그를 어제보다 나은 자기 자신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편안히 앉아서 감상하거나 만드는 것에 가깝다고 여겨져 온 음악은 사실 예술보다 체육에 가깝다. 음악 감상은 고막의 진동,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좋은 음악에 압도되면 몸이 떨린다. 카타르시스다. 이보다 더 좋으면 몸이 움직인다. 가까운 테크노 클럽에만 가도 내일이 없는 듯이 스피커에 몸을 맡기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에게 음악은 예술이 아닌 체육이다. 흰 벽의 갤러리에 걸린 그림 감상이 아니라 손발을 내지르는 태권도다.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한 관찰이 있다. 어린이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춤을 춘다. 그들은 온몸으로 즐거움을 표현한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음악이 주는 즐거움에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반응한다. 누가 볼까 봐 춤을 멈추지는 않는다. 음악이 이끈 몸 쓰기는 오로지 나를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음악은 예술이 아닌 체육이다. 부모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머리로 하는 학습지 풀이가 아니라 온몸을 동원한 놀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글쓰기를 위해선, 그 외의 모든 정신적 활동을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 작가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은 그저 몸에 기생하는 무엇”이다. 몸쓰기와 글쓰기는 함께 갈 수밖에 없다. 굳이 중요도를 따지자면 지덕체가 아닌 체덕지가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또한 어느 시점에는 몸쓰기를 경시하고 작업실에 파묻혔음을 고백한다. 그때 떨어진 체력으로 인해 마음의 우울이 20대 말미의 나를 집어삼켰나 보다.
지금의 내가 격투 시합에 몰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몸의 저력을 무시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하기 때문일까? 이 쪽으로 갈지 저 쪽으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때를 떠올린다. 책상에 앉아서 두 갈래를 고민하다가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기 일쑤였다. 방향에 대한 고민이 들 때 오히려 옳은 길로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선 몸의 힘을 끌어 와 어느 쪽이든 일단 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몸쓰기에 능한 사람이라면 그 길이 막혔음을 깨달았을 때 빠르게 되돌아와 바른 길로 나아갈 체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