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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공사칠 Oct 27. 2024

용기

힘을 내어 밭을 일구면 보이는 것들

시합을 며칠 앞두고 두 번째 아마추어 시합 대진표가 나왔다. 다른 수련생과 사범님들은 한국인과 붙게 되었으나 나만 러시아 이름을 가진 사람과 붙게 되었다. 두 눈을 의심했다. 괜찮을까? 내 머릿 속에 있는 러시아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냉욕을 즐기는 현재 러시아 대통령과 수많은 다게스탄 출신의 파이터들. 차가운 기후 속에서 몸을 단련하는 냉혈한들.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등 아름다운 러시아 이름들도 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냉철한 눈초리로 상대를 집어 던지는 무서운 이름들만 떠올랐다.


아마추어 시합 3분 1라운드 내내 두들겨 맞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려움은 시합 전날까지도 이어졌다. 도살장에 끌려 가길 기다리는 가축의 심정.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번에도 지는 것인가. 나의 두려움을 읽은 관장님이 계체 전날, 시합에 출전하는 수련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신다.


민족마다 신체적인 특징이 있다고. 서양인은 대체로 힘이 세지만 아시안은 지구력이 강하다고. 우리나라 옆 동네인 동남 아시아에서 태국무, 통칭 무에타이를 수련한 강자들이 나왔다고. 방으로 돌아와 시합을 기다리며 약 10년 전, 군대에 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2023년 4월 28일의 기록


갑자기 기억이 2014년 군생활로 거슬러 오른다. 훈련소를 졸업할 때 오래 달리기를 하다 내 앞에 사람이 몇 없음을 깨달은 나는 이후에도 중대 체력 시험이 있으면 달리기 만큼은 3등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남들과 비교해 근력은 현저하게 낮은데 이상하게 달리기는 잘 버텼다. 그저 난 끈기가 있었다. 지치고 힘들지만 내 자신을 앞으로 추진하고 이를 유지하는 힘이 있었다.


내일 시합에 앞서 다시 한 번 나의 지구력에 대해 생각한다. 상대가 러시아인이든 고려인이든 상관없이 난 끝까지 갈 것이다. 힘에서 밀린다면 몇 번이고 도끼로 나무를 찍을 것이다. 20대 초반 가장 빛나는 시기에 마시고 내뱉던 숨을 기억한다.




그렇게 두려움을 벗 삼아 두 번째 시합을 했다. 시합의 결과는 3:0 만장일치 판정승. 상대는 중앙 아시아 계열로 보이는 선수였다. 처음에 몇 대 주먹을 맞아 보았는데 예상처럼 힘이 좋고 아팠다. 그래도 알고 맞으니 맞을만 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피하고 때리기를 반복했다. 상대가 자신이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거란을 맞이한 고려인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다행히 상대가 기합을 내질러준 덕분에 소리에 맞춰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날은 나도 나대로 기뻤지만 함께 수련한 동료들과 사범님들도 활약한 덕분에 우리 팀이 아마추어 종합 우승을 거두어 기뻤다. 물론 성과와 동시에 우리의 부족한 실력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태권도인으로서 다들 용기 있는 한 발자국을 내딛은 것 같아 뿌듯했다.




용기라는 단어를 이루는 용勇 을 들여다 본다.


사람(⺈)이 힘(力)을 내어 자기만의 밭(田)을 일구는 모양새. 대학교 때 친구들과 농촌 활동을 가 느낀 바가 있다. 밭을 일구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땡볕에서 허리 굽혀 고생하며 캐던 감자를 기억한다. 이 조그만 것을 하나 얻기 위해 힘을 내어 밭을 일구는 시간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들여 밭을 일구다 보면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어떤 것들이 몸과 마음에에 밟힌다. 밭에 들어가 고생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풀의 냄새가 이러했나? 내 땅에 이런 곤충들이 살고 있었나? 매일 함께한 햇볕이란 것이 이토록 뜨거웠고 동시에 따뜻했나? 흑백 티비라 여겼던 밭이 어느새 칼라로 변했다.


용기를 내어 두려움으로 기어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힘이 들고 괴롭지만 들어가서 버티면 본 적 없는 것들이 나를 반긴다. 링을 밟기 전과 후는 다르다. 무대에 서기 전과 후도 다르다. 내게 필요한 유일한 준비물은 무턱대고 두려움으로 들어갈 용기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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