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강한 태권도로 가는 길
밟을 태에 주먹 권. 그 아래에 깔린 길 도. 태권도는 땅을 밟는 힘을 끌어 모아 손발을 내질러 상대를 타격하는 무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로 kickboxing이라 말할 수 있겠다.
사람마다 몸의 생김새와 능력치가 다르다. 그러므로 각자의 손발이 그리는 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만의 태와 권으로 나만의 길을 갈고닦는 개인적인 무술. 동시에 자기 길을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수련하는 사회적인 무술. 그것이 태권도다. 두 번째 아마추어 시합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운 좋게도 여러 태권도 사범님들과 수련하게 되었고 각자가 그려온 길을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시합에서 지고 난 후 결심했다. 하루라도 수련을 거르지 않겠다고. 지난 시합을 준비하면서 일과 약속을 핑계로 며칠 정도 수련을 걸렀다. 도장에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일부러 늦게 온 날도 있었다. 몸이 너무 힘들어 수련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매일 도장에 나오겠다고 마음먹은 내게 야간 선수반이 운영될 것이라는 사실은 기뻤다. 일반부 수련 시간에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날에는 야간 선수반에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야간반은 오후 11시부터 실전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범님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들은 모두 다음날 아침에서 점심 사이에 도장에 출근하기 때문에 정해진 스케줄이었다.
태권도 사범들의 격투 시합 수련. 어떤 분들이 오실지 궁금했다. 화려한 태권도 발차기를 격투 시합에서 볼 수 있겠구나. 일반인인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회축과 이단 발차기가 궁금했다. 기대를 품은 채 도장으로 향했다.
강진태권도연맹. 진짜 강한 태권도를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 그러나 사범님들의 첫 격투 선수 수련은 진짜 약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맞지 않는 킥. 허우적대는 주먹. 신기했다. 태권도를 오랫동안 수련한 체육인들에게서 첫 시합을 준비하던 때의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옆에서 관찰한 이들의 두 달 남짓한 격투 수련은 지금껏 쌓아 온 태권도가 무너지는 나날이었다. 평생 갈고닦아 온 태권의 길이 킥복싱, 그리고 실전 격투라는 새로운 룰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상처 입은 태권도와 개인의 명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이들이 강진이라고 느낀 이유는 열심히 두들겨 맞은 다음날에도 야간에 도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이는 레드맨이다. 성이 홍 씨이기 때문에 레드맨이라고 불리는 이 남자. 헤드 기어를 착용하는 세미프로 시합에서 나오기 힘든 펀치 케이오를 맛본 적 있는 붉은 오른손. 지금은 8전 남짓한 전적을 쌓은 실력자다. 태권도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기술인 뒤후려차기로 상대의 턱을 돌려 값진 승리를 얻은 적도 있는 그는 첫 시합을 준비하던 때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특히 주먹을 무서워했던 그의 표정이 기억난다. 냄새나는 쓰레기를 바라보듯 주먹을 피했다.
그러나 레드맨은 매일 KTX를 타고 야간에 등장하는 정열의 사나이. 충남의 한 태권도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매일 밤 서울과 아산을 오가며 수련했다. 대부분의 사범님들이 서울과 수도권 근처에서 오시던 것에 비해 야간 수련은 그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이다. 수련이 끝나고 지인의 집에서 잠시 머문 뒤 아산으로 가 도장 문을 열었다는 레드맨. 단 하루도 수련에 빠진 적이 없는 그의 근성을 기억한다. 매일 밤 흔들리던 레드맨의 태권도 속에서 열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진으로 인해 금이 간 그의 길 위에 새로운 싹이 트고 있었다.
나는 현재 한 음악 사업단에서 여러 인디 뮤지션을 마주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면서 가끔씩 낭패에 사로잡힌 표정들을 발견한다. 1-2평 남짓한 작은 작업실에서는 꽤 괜찮게 들렸던 음악. 어제까지 내가 쌓은 지식과 감각을 때려 부은. 분명 괜찮은 음악이라 여긴 곡이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들으니 무척 별로라고 느껴지는 마법에 걸린 것이다. 모두가 웃고 떠들 때 홀로 심각해져 말이 없어진 이들을 본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큰 기쁨을 느낀다. 아, 저들의 새싹이 자라나고 있구나. 그들만의 태권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길이 세워지는 중이다.
어제보다 튼튼한 도로를 깔려면 어제의 길은 부서져야 한다. 아쉽고 속상하고 화가 나지만 금이 간 포장을 뜯어내야 새 길을 깔 수 있다. 어제의 자화상을 붙잡고 만족하면 새 길은 날 수 없다. 사진 속 그가 무너질 때만 오늘의 내가 새로 태어날 수 있다. 평생 걸어온 길이 무너질 때 새 길로 향하는 통로가 열린다.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진짜 강한 태권도, 그리고 진짜 강한 예술이 싹을 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