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기도문
우리 아빠는 100점짜리 아빠였다. 고된 육아기간 동안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었고 주말이면 언제나 나와 오빠를 데리고 나들이를 갔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란 어른들의 짓궂은 물음에 언제나 내 대답은 아빠였다. 내게 아빠는 든든한, 변함없는 나무였다.
그랬던 아빠가 요즘 들어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공기업에 다니는 아빠는 한동안 “자영업자는 불안정해서 힘들고 대기업은 업무 분위기가 빡세서 힘들고…”로 시작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던진 후, “결론은 공기업이 최고”로 끝나는 자기 위로의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주식 투자에 꽂혀있다. 3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빠는 입만 열면 ‘가치투자, 배당금…’ 뭐 그런 이야기들만 한다. 화제를 돌리고자 다른 화두를 던져보아도 돌아오는 건 피상적 공감뿐, 대화가 유의미하게 진전되지 못한다.
아빠가 삶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 숫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금 받고, 배당금을 매달 100만 원 정도 받는 수준까지 만들어 놓고 책이나 읽으면서 노후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 이 이야기 역시 주식 투자 이야기처럼 몇 년째 도돌이표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나와 오빠에 돈 걱정을 안겨주지 않으려 일평생을 바친 아빠는 돈의 논리에 잠식돼 버렸다. 당신의 주관은 돈의 논리로만 작동하게 됐으며 감정 또한 당신의 인생에서 사치가 돼 버렸다. 2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아빠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깰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 딸인 나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다리던 그 순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이 중년 남성이 툭 하고 무너져버리지 않길 기도할 뿐이다.